세기의 대결이 성사된 것 만으로도 더 바라는 것은 없다...
두 선수와 그 팬들 모두를 그저 축복해주자, 그야말로 빅매치니까.
한 리그에서 명경기가 몇개씩이나 나오기를 바라진 않는다,
임요환 vs 홍진호, 그 세 경기 만으로도 내 허기는 다 채워졌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경기가 끝나고 경기 결과를 보는 마음으로
내용마저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지켜보리라- 그렇게까지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불가능하더군요. 사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알고 있었죠. ^^;
저절로 임요환, 그의 드라마틱한 승리를 바라고 또 바라는 나의 모습.
그러나 3경기 이외에는 상당히 일방적인 패배...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겨우 몇 분, 몇 초만에 나의 진심을 드러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1경기의 끝에서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시작이다, 역시 나다는 강하다.
2경기의 시작에서 생각했습니다. 박서니까, 그래 그는 승부사니까...
3경기의 종반부에서는 그래, 이제야 됐어, 아직 희망이 있어 하고 되뇌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4경기를 지켜보며 더욱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는지도 모르지요.
저는 이윤열 선수를 솔직하게 축하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의 좁은 마음을 질책하고 애써보아도 쓰디쓴 감정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2경기의 아쉬움과 3경기의 화려한 플레이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패배했는데도.
항상 그가 승리하면 역시 그의 플레이는 멋지고 화려하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패배하면 황제도 질 수 있다, 그래도 그는 위대하다고 외쳤습니다.
왜 솔직해질 수 없었을까요? 그저 승리는 승리, 패배는 패배일 뿐인데.
그는 게임을 이기고, 게임을 지고, 그런 한 명의 선수일 뿐인데...
나는 어리석게도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과연 나를 속여왔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그런 의문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임요환의 부활, 황제의 귀환...그런 얘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인지
어느새 나 역시 그런 구호를 외치며 오래 기다려온 것 같습니다.
그는 부활할 것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귀환을 선언할 것이다!
산야를 떠돌며 스트라이더라 불리던 아라곤이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면.
테란의 황제가 연출해내는 드라마를 보고싶어하는 내가 있었죠.
왠지 스스로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의 많은 팬들이
바라고 있던 모습은 바로 그런 화려한 부활의 축포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이런 목소리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적도, 떠돈 적도 없다!'
자주 진다 싶더니 튀는 신인도 노련한 강호도 곧잘 잡아내며 올라가고
OSL 9회 연속 진출, 상당한 승률, 상금랭킹 최상위, 각종 랭킹 최상위...
예전만큼 탁월하고 독보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강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있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돌이켜보면, 나는 그의 패배에 아파하더라도 실망한 적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의 승리에 열광하더라도 만족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8강, 4강, 한 계단씩 차례대로 밟아올라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의 심장도 그와 함께 더욱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 그리고 더 위...그래, 최고의 자리를 향해. 우승을 향해.
...아아, 그렇다. 나는 다만, 그의 "우승"을 보고싶었을 뿐이다...
너무나 간단해서, 어이없는 결론.
어떤 선수의 팬이건 당연히 바라고 있을 그런 열망을 가슴에 품었을 뿐...
하지만, 그는 황제다! 어떤 다른 선수와도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때,
그 평범하고 소박한 꿈은 퇴색되어 일그러진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화려한 귀환을 꿈꾸며, 나의 황제는 모두의 황제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를 최고라고 말하길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다시 우승하여 자신이 최고임을 입증해야만 한다고-
그런 이기적 욕망. 나를 속인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불과했습니다.
임요환, 그는 언제나 자신의 할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전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초조함과 이기심에 패배해왔던 것이죠...
프리미어 리그 결승전은 끝났고, 다시 한번 황제는 자신의 전장에서 졌습니다.
이윤열이라는 막강한 적을 향해, 그는 다시 행군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나 자신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그의 전쟁에 동참할 겁니다.
이제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의 이기심에 패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임요환은 죽은 적도 떠돈 적도 없으므로, 부활을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가 귀환해야할 왕국은, 어느 별나라나 타인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명경기라 부르기도 어렵고, 한편으론 일방적이었던 그의 패배.
그러나 그 패배의 자리에서, 평화를 되찾은 내 마음의 왕국에
나의 황제가 돌아왔습니다.
황제의 귀환에 기뻐하며, 20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