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12/25 23:15:21
Name 한니발
Subject DAUM <5> 中上
2경기, 몽환 (김준영 0 : 1 변형태)

  「Get out of my way.」
                                          - Mell, 「Red Fraction」 中



  파이썬을 변형태가 차지했음에도 승부의 추는 아직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불과 1경기, 그런 이유도 물론 있을 것이나 그보다도 2경기의 맵이 더 주된 이유였다. 모든 테란이 그 발걸음을 멈춰야 하는 곳. 제 갈 길을 헤매어야 하는 곳. 테란의 무덤, 몽환.
  테란은 이곳에서 한 번 승리하기 위해 열네 번 패잔병을 묻었고, 저 이영호조차도 그 불명예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꿈결 속에서 테란의 발걸음은 다른 두 종족 누구와 비교해도 더 느렸다. 변형태라 해도 여기서는 질주를 멈춰야 한다.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결승 변형태 VS 김준영 in 몽환.

  변형태 11시, 김준영 5시.
  김준영은 다시 한 번 앞마당을 먼저 가져갔다.
  4강 5경기에서, 김준영은 잔혹하리만치 압도적으로 이영호를 짓뭉갰다. 이영호의 통찰력이 이미 김준영을 꿰뚫고 있었음에도 벌어진 결과였다. 이영호는 김준영이 밟아나갈 길을 알고 있었고, 레어 테크에서 그 저글링 - 러커 병력의 움직임을 잡아내어 김준영의 멀티를 공략하는 것이 승부처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센터에서 엇갈렸다. 테란의 무거운 발걸음은 저그 병력의 고속 기동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몽환은 테란 절멸의 전장이다.
  네 개의 전장이 한 데 모여 어지러이 짜 맞춰진 곳. 그만큼 그 길들은 멀고 험하여, 가뜩이나 기동력이 떨어지는 테란에게 최악의 조건만을 제공한다. 테란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때 그들 삼군주의 패도에 놓여있던 전장들을 헤매다 보면 저그와 프로토스는 어느샌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덩치를 불려 습격해온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따라주지 못하니 패배하는 것이다.
  김준영은 자신이 있었다. 몽환의 얼키고 설킨 험로가 변형태의 발목을 잡아 주리라. 이 게임을 무난히 후반으로 이끌어 주리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 설령 상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본다고 해도 무의미하다.
  몽환에서 테란과 이종족들 간 전적은 1:14. 테란과 저그는 0:8.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차라리 타당하다.

  변형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몽환에서 테란과 이종족들 간 전적은 1:14.
  그리고 그 1승은, 변형태가 송병구를 무너뜨리고 얻어내었다. 그렇다면 변형태에게 있어서는 그 1승만이 전부다. 테란의 14번 패배는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김준영은 알아차려야만 했다.
  변형태의 선택, 그것은 어떤 험로도 주파해내는 스타크래프트 최속의 유닛, 비행보다 빠르다는 벌쳐다.
  엑셀을 밟았다.
  그는 꿈결에서조차 멈추지 않고 돌파할 생각이다. 그 길에 놓여있는 그 무엇도 그는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다.

  



  김준영은 성큰 콜로니와 저글링으로 방어선을 건설했으나, 변형태는 R.O.V 앞마당 뒤편 미네랄을 뚫고 길을 열었다. 세 기의 벌쳐가 파고들 틈을 엿보면서 해처리와 에그를 연신 두들겼다. 김준영은 그를 제압하기 위해 다시금 다수 저글링르 생산해야만 했고, 저글링들은 벌쳐를 쫓아내는 데까지는 간신이 성공했다. 그러나 달아나는 벌쳐를 추격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 기의 저글링조차 생환은 허락되지 못했다. 저그 병력 기동성의 주축인 저글링이라 해도, 스타크래프트 최속의 벌쳐가 상대여서야 건드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가운데 변형태는 앞마당을 가진데다 이미 바이오닉 체제로의 턴이 끝난 상태였다.
  김준영은 뒤늦게 자기 길을 출발했다.
  - 시작은 뮤탈.

  망설임을 버리고, 자기 길을 확신했을 때 김준영이 보여주는 컨트롤이라는 것은 박성준이나 훗날 이제동의 그것에 견주어도 그닥 뒤지지 않는다. 김준영은 변형태의 마지막 벌쳐 난입을 간단히 막아낸 뒤 7시 앞마당을 가져가면서 뮤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형태의 본진인 1시에서 김준영의 제 3가스 멀티 7시로 향하는 경로는 가히 원정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노스탤지어 지형 특유의 다리를 건넌 뒤, 방형의 언덕을 넘어, 개마고원 지형의 평원을 가로지른 뒤에야 크립 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더욱이 그 기나긴 원정을 김준영의 뮤탈이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성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열 기 가까운 머린을 잃었고 언덕을 넘으면서 또 몇 기, 평원을 가로지르면서 또 몇 기를 잃었다. 심지어 뮤탈 공격 한 번에 쓰리 쿠션으로 머린 세 기가 동시에 죽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이 뒤 김준영의 멀티에 도달했을 때 일어날 전투의 결과는 명백했기에, 결국 변형태는 본진으로 병력을 회군시켰다.
  김준영의 승리였다.
  이제 러커가 생산되면 7시는 안정권에 들어서고 3, 4가스를 무난하게 확보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후반 - 김준영이 자랑하는 무대다. 할 일을 마친 뮤탈들은 한가로이 전장을 배회하며 마인을 제거하면서 저럴 병력의 센터 진출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변형태가 두 번째 진출을 감행했다.



  이미 생산된 저글링과 러커는 김준영의 앞마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뮤탈은 일전에 임무를 마친 잔여 병력들로서, 이미 상당히 체력이 빠진 상태였다. 고로 현 시점 7시에 위치한 것은 세 기의 성큰과 몇 기의 저글링, 막 변태에 들어간 러커 에그가 다였다. 그들이 공1업 바이오닉 부대를 막아내야 하는 병력이었다.
  물론 앞마당에 자리한 김준영의 저럴 본대가 변형태의 병력 후방을 후리기 시작하면 별다른 성과 없이 바이오닉 병력이 전멸한다는 결과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변형태의 병력이 진군한 것이다. 그 무엇도 돌아보지 않고, 일직선의 최속 행군을 감행한 것이다.
  적 본대가 도달하기 전에 함락시키면 변행태의 승리다.
  적 본대가 도달하기 전까지 함락시키지 못하는 변형태의 패배다.
  단 두 문장으로 이 게임의 승리가 결정된 지금, 몽환의 복잡하고 험난한 길들은 일제히 그 의미를 잃었다. 사방팔방으로 엉켜 뻗어나간 그 수많은 길들이 모두 죽었다.
  이제 의미 있는 길은 단 둘 뿐이다. 변형태의 본진에서 김준영의 7시로 이어지는 최단거리와, 김준영의 본진에서 7시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돌아온다는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전진뿐인 일방통행.
  두 개의 일직선이 맵 위에 그어졌다. 이 순간, 몽환은 테란과 저그 양편 모두에게 공명정대한 직선 서킷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당연히, 직선 서킷에서는 언제나 앞서 공세를 시작하는 변형태가 더 빠르다.
  선고가 내려짐과 동시에 김준영도 자신의 저럴 본대를 휘몰아 7시로 내달렸다. 7시에서는 이제 막 마지막 성큰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김준영이 변형태의 바이오닉을 진압했을 대, 아직 저그의 7시 해처리는 건재한 채였다.
  그러나 드론들과, 저럴에 앞서 시간 벌이용으로 투입된 뮤탈들은 전멸 당했다.
  사람들은 후반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들어 김준영의 우세를 점쳤으나, 변형태는 김준영의 필승 패턴 : 그 연결고리는 바스라뜨려 놓았다. 제 3 가스기지가 피해 입은 가운데서의 하이브. 이제 제아무리 대인배, 대인배를 소리 높여도, 울트라 군단은 오지 않는다.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메워, 크립을 걷어내고 저그를 짓뭉개, 변형태는 모든 것을 치고 두들겨 자신의 길로 만들었다. 레이스는 이미 테란이 제압했다.
  변형태는 계속해서 센터에 병력을 배회시키면서 일찌감치 개발한 마인을 사방에 설치하여 중앙을 장악했다. 드랍쉽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공중을 누비며 저그에게 피해를 입혔다.
  김준영의 길은 변형태의 길에 가로막혔다. 저글링과 러커,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울트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맵 북단이 전부 테란의 손에 들어갔고, 막강한 자원력으로 쌓인 구름베슬이 디파일러와 러커에 쉬지 않고 이레디에이트를 내리꽂았다. 김준영의 코앞에 포격을 개시한 탱크를 향해, 살아남은 디파일러는 항거하듯 네 번 다섯 번의 다크스웜을 연달아 내뿜었으나, 변형태는 오래 전부터 다크스웜으로 뛰어드는 테란으로 악명 높았다.
  이 경기, 김준영이 생산해낼 수 있었던 울트라는 최후의 세 기.
  그 세 기는 결사대를 이끌고 11시로 들이박은 뒤 남김없이 도륙 당했다.
  GG.
  변형태 VS 김준영, 2:0.





  2003년, 여름.

「…아주 약간, 모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바다를 건너는 '절망'을 찾는 여행이었습니다. 나라를 떠나 바라본 바다는 너무나도 컸고…그 바다에 퍼져 있었던 각각의 섬들은 너무나도 강해 보였습니다. 본 적도 없는 생물 … 꿈만 같은 풍경, 파도가 연주하는 음악은 때로는 조용히 작은 고민을 감싸 안듯이 부드럽게 흘렀고 때로는 격렬하게 나약한 마음을 잡아 찢듯이 비웃었습니다…」
                                                                                                                                                                                   - 오다 에이이치로,『One Piece』 中
                                    

  김준영의 '무적의 후반'도.
  몽환의 '테란 절멸'도.
  유아독존 일방통행이 전부 부숴버렸다. 일직선의 길에 덮여버렸다. 지극히, 변형태스럽게도.
  이제야 승부의 추는 기울어졌다. 1경기 이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변방에서 온 버서커가 품은 파란의 꿈, 그 무게가 김준영의 그릇을 압도하고 있다.
  이제껏 단 한 명의 선수도 스타리그 결승 2:0에서 승부를 뒤집은 예는 없다.
  김준영이 - 한빛이 졌다.
  자리를 정리할 채비를 하던 중, 나는 문득 상념에 잠겼다.
  DAUM의 결말이 코앞으로 다가온 그 때, 비로소 나는 비오는 날의 결승을 떠올려냈다.



  4년 전, 여름의 끝자락.
  2003년 8월 30일. 올림픽 공원.
  KTF EVER컵 2003, 초대 프로리그 결승전. 동양 오리온즈 VS 한빛 스타즈.
  제국의 첫 번째 패도.

  이 때 한빛 스타즈는 아직 변길섭·나도현·박경락·강도경·박정석 모두를 갖춘 리그 최강의 전력이었다. 스타즈는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한 채 결승에서 동양을 맞았다.
  한편 동양의 멤버는 임요환 - 최연성- 김성제 - 박용욱 - 이창훈 - 백대현의 6명. 최연성은 막 데뷔한 신인이었고, 박용욱은 프로게이머로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이전에 결승을 경험해본 것은 임요환이 유일했다. 그 외는 박용욱이 한빛소프트배(2001) 당시 4강을 한 번 찍었던 것이 나머지 멤버들의 최고 기록이었다. 더욱이 오리온즈는 당시 계몽사배 팀리그에서 예선 탈락을 당하면서 임요환 1인에 의한 급조팀 - 팀으로서의 자격까지도 의심받은 바 있었다. 한마디로, 누가 봐도 뻔한 승부였다.
  이 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동양은 당대 최강 한빛 스타즈를 4:1로 거꾸러뜨렸다.

  


  한빛 스타즈에게 있어 동양은 이전까지의 팀들과는 전혀 다른 적이었다. 주훈 감독은 이 리그 신인왕이었던 최연성을 팀플에 배치하는 변칙 엔트리, 상대의 출전 선수를 예측하고 맞춤전략을 장착시키는 엔트리 저격 등등 이전에 시도된 바 없는 개념들을 승부에 포함시켰다. 그 기괴한 움직임은 철저하게 정면 승부만을 준비한 한빛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승부의 분수령이 된 3경기는 한빛에게 있어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으리라.
  제 3경기, 박정석 VS 이창훈 in 기요틴.
  이 경기는, 유구한 스타리그 13년 중에서도 유일무이한, 중립동물이 승패를 가른 게임으로 남아있다.
  팀플 스페셜리스트 이창훈이 개인전에서 박정석을 잡아내기 위해 준비한 전략은 더블 레어 - 패스트 드랍이었다. 두 개의 레어에서 오버로드의 속업-수송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필살기였다.
  그런데, 박정석의 질럿이 이창훈의 포위망을 벗어나 저그 진영으로 파고들었다. 일촉 즉발, 정찰당하는 동시에 성공 확률이 반토막날 위기였다.
  그 순간. 사막 지형 중립동물인 스칸티드(Scantid)가 질럿의 앞길을 막아섰고, 버벅대던 질럿은 히드라에게 잡히고 말았다. 박정석은 그대로 드랍 전략에 당하고 무너졌으며 이창훈은 결승전 MVP를 수상했다.
  앞으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판 공공의 적으로 군림할, 제국 SKT T1의 첫 우승이었다.

  그 때 중립동물이 프로브의 진로를 가로막은 것은 동양에 승운이 따랐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얇은 우비에 의지한 채 빗속에서 결승을 관람한 사람들은 증인이 되었다. 이제 제국의 시대가 개막했으며, 다시 한 번 황제와 그의 기사들이 시대의 파도가 되어 덮쳐올 것이란 사실에 대하여. 그 앞에 놓인 이들에게 거부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제국을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 움직이게 되리란 사실에 대하여.
  절망적인 전력 차가 존재하는 승부에서 승리의 여신은 제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년을 이어질 그들의 패도를 축복하였다.
  그 폭우 속의 무대는 - 시대의 주인을 위해 준비된, 썩 드라마틱한 무대였다.

  그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의 이름이 판 전체를 떨쳐 울렸다.
  그 시간 동안 박용욱은 강민을 물리치고 마이큐브를 제패하면서 3대 프로토스의 하나로 뛰어올랐고, 최연성은 이윤열의 시대를 끝장내고 MSL에 군림했다. LG IBM 팀리그에 그들의 깃발이 올라갔고, 4U 시절을 거쳐 마침내 대기업 SK Telecom이 그들을 후원할 것을 결정했다.
  SKT T1, 임요환-최연성-박용욱을 앞세운 그들은 스폰서 확보 이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그들 위명을 드높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었다….



  그 때, 다시 한 번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요란하게 터져 나오며 상념을 깼다.
  제 3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보이는 지금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탄성을 내질렀다. 조명이 지치지 않고 번뜩였다. 전용준 캐스터의 고함 소리 역시 변치 않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너 미쳤냐?"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폭우 속의 결승을 다녀온 누군가가 웃으면서 해준 이야기다. 비옷에 감기약까지 준비하면서 결승 오프를 가겠다며 친구를 꼬드겼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대뜸 그렇게 내뱉었다고 했다.
  여하튼 투덜대는 친구를 어찌저찌 끌고서 올림픽 공원까지 갔다. 그랬더니, 비옷을 입은 사람들로 그 넓은 터가 입추의 여지 없이 꽉꽉 들어찬 걸 보고, 그 친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또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니가 제일 미친놈인 줄 알았더니, 니만큼 미친놈들 겁나 많네."

  나는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았다.
  그래. 미친 셈 치고 즐겨보자. 그러려고 온 거 아닌가.
  편하게 마음을 먹고, 옆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대를 향해 환호했다.
  어쩌면 이 DAUM의 끝이 될 지도 모르는 게임의 시작을 기다리면서, 나는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 아마도 그건 분명히, 그 때부터 1년이 지나 다시 2004년의 여름 - .



  지금 생각해보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히치하이커의 화면이 열리는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이상한 예감을 느꼈던 것 같다.





  3경기, 히치하이커 (김준영 0 : 2 변형태)

「必死卽生 必生卽死」
                            - 이순신



  탄식. 혹은 숨죽임.
  설마 했더니 정말로. 혹은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변형태 : 1서플 이후 전진 투배럭.

  DAUM 스타리그 2007 S1 결승 변형태 VS 김준영 in 히치하이커.

  변형태 11시, 김준영 5시.
  2:0. 승자의 여유를 가지고 - 여유가 없었더라도 변형태는 그런 짓을 충분히 저지르는 남자지만 - 변형태가 다시 먼저 움직였다. 히치하이커 중앙 협곡을 가로막는 전진 투배럭. 비록 서플라이 건설 이후라고는 해도 일꾼을 쉬어가면서 감행하는 공습이었다.
  김준영은 배럭이 완성되기도 전에 드론 서치로서 이를 파악했다. 하지만, 건설 중인 12앞마당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변형태가 1마린과 2SCV로 김준영의 앞마당에서 압박을 시도하자, 과감하게 여섯 기의 드론을 동원하여 별 피해 없이 변형태의 병력들을 뒤로 쫓아냈다.
  변형태가 잠시 숨고르기를 선택했고, 소강 상태가 찾아왔다.
  김준영은 계속해서 저글링 생산에 주력하면서 앞마당에 레어를 올린다.
  여기서 다시 선택은 변형태의 몫이다.
  앞마당?
  아니면 불꽃?
  변형태는 자신의 앞마당에 전진 팩토리를 건설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타이밍을 당긴 탱크와 바이오닉 병력의 합동 작전 - 이미 4강에서 이영호가 선택하여 김준영을 무너뜨린 바로 그 선택이다. 김준영이 여섯 번째의 성큰 콜로니와 스파이어를 건설하던 바로 그 때, 변형태의 첫 번째 탱크가 김준영의 앞마당에 도착했다.

  반복.
  그 순간 4강 2경기 이영호와의 히치하이커 게임이 머릿속에서 오버랩된 사람은 적지 않았다. 변형태는 이번에도 뒤를 보지 않을 것이었다. 히치하이커, 그 중앙을 가르는 일직선의 협곡을 질러오기만 할 것이다. 뒤는 없다. 즉, 막으면 이긴다. 막기만 한다면.
  물론 그 조건은 지난번에도 마찬가지였고, 그 때는 막지 못했다. 그리고 이영호는 무덤덤하게 결론지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1경기 파이썬, 스스로의 모습을 버리고 맹공을 택했고 자멸했다.
  2경기 몽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으나 모두 읽혔고 완패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한 번의 실수는 곧 끝으로 이어진다.
  만일 여기서 끝난다면, 김준영은 만족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결승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으니 됐다. 이렇게 만족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DAUM은 프로게이머 김준영, 그 화려한 이력의 시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훗날 사람들은 '그는 첫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으나 그 좌절은 이어질 위업들을 위한 단초에 불과했다', 그리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가져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김준영은 알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저 다음엔 잘 되리라 기대할뿐인 그런 뻔뻔함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16강 저그였을 때, 그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것을 두려워했기에 한걸음도 더 내딛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내린다.
  위선적인 자기 위로 없이도,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Good Game.
  김준영은 바로 지금, 여기서 이 한 번 싸움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남김없이 불사르기로 했다. 그래야만 저 변방의 테란이 퍼붓는 광포한 공격에 맞설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변형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제 전부를 불사르면서 질주해오고 있었다.
  창끝과 창끝이 김준영의 앞마당에서 거세게 맞부딪혔다.



  엄밀히 말해서, 이 게임은 이영호 VS 김준영 in 히치하이커의 완전 반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김준영은 그 때와는 명백히 다른 선택을 했다. 이영호가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때 김준영은 3해처리 째를 선택했지만, 변형태가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때 김준영은 2해처리 레어를 선택했다. 자신 또한 어설프게 뒤를 생각하기 보다 이 싸움으로 결정짓겠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다.
  성큰 방어선이 유지될 동안 뮤탈리스크가 보다 빨리 모였다. 성큰 방어선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에 테란은 쉽사리 전진할 수 없었다. 그동안 뮤탈들은 잠시간 자유를 허락받았고, 그 자유로운 촌음이 김준영에게는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한 틈새였다.
  김준영은 이미 몽환에서 보여준 바 있는 화려한 뮤탈 컨트롤로 순식간에 두 기 탱크 가운데 한 기를 잡아냈다. 뮤탈은 그대로 테란의 후방, 협곡의 끄트머리로 날아가 바이오닉 병력의 시야 경계를 오가면서 계속해서 테란의 증원 병력을 끊었다.
  성큰 방어선을 쉬지 않고 재건하는 통에, 김준영의 앞마당에서 미네랄을 채취하는 드론은 불과 두 기.
  그러나 변형태 또한, 일꾼 생산은 물론 가스 조절까지 해가면서 본진에서 병력을 짜내는 중이었다. 이미 두 사람 모두 이 전선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히 유지되던 전선의 균형은, 김준영의 뮤탈리스크가 미끄러지듯 활공하여 변형태의 마지막 탱크를 잡아내면서 깨졌다.

  2기째 이후로 변형태의 탱크는 더 이상 추가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변형태는 공격에 사활을 걸었다. 탱크가 성큰 방어선을 완파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성큰 방어선을 충분히 약화만 시켜준다면, 끊임없이 찍어낸 바이오닉 병력으로 일거에 몰아쳐 안일한 저그의 숨통을 끊을 셈이었다.
  헌데 - 저그가, 김준영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뮤탈이 계속해서 쌓이며 변형태의 보급선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성큰은 한 기가 파괴될 때마다 두 기가 증축되었다.
  마지막 탱크마저 터져나가자, 변형태는 왠지 모르게 평온한 마음으로 김준영의 앞마당에 스캔을 뿌렸다.
  미네랄을 캐고 있는 드론의 수는, 단 두 기에 불과했다. 변형태는 속으로 실소하고 말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김준영은, 뒤를 버리고 싸울 줄 아는 선수였다.

  

  변형태는 자신의 눈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협곡을 거슬러 퇴각하려던 병력들을 다시 전진시켰다.
  협곡을 거슬러 돌아오려 한다 해도 그 사이 뮤탈에게 유격당해 그 수는 절반도 남지 않게 되리라. 또한, 이미 배수진을 친 싸움에서 후퇴하려는 자신도 용납할 수 없었다.
  변형태의 병력은 마지막으로 총공세를 펼친 뒤 전멸 당했으며, 직후 테란 본진으로 역습해온 뮤탈리스크가 유린을 시작하자 곧바로 변형태의 GG가 선언되었다.
  변형태 VS 김준영,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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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에이스
12/12/26 10:4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다만 좋은 글에 오류가 없는게 좋을 것 같아서 남깁니다.

스칸티드가 막은 것은 박정석의 프로브가 아니라 질럿이었습니다.

고쳐주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저는 완독하러 가겠습니다.
한니발
12/12/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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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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