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나라에서 독일은 별로 인기가 없는 팀이죠. 화려한 개인기나 빠른 돌파, 눈돌아가는 패스와는 거리가 먼,
게르만의 체격을 바탕으로 한 공중볼과 지휘관을 중심으로 한 수비적 조직력이 뛰어난 팀 정도의 이미지. 화끈하기
그지없는 남미 쪽이나 스페인-포루투갈은 물론 비슷한 스타일의 잉글랜드-독일과 비교해도 리그와 리그 내 슈퍼스
타의 인지도에 밀려버리는 대표팀입니다.
사실 왜 이런 팀을 좋아하게 됬는 지는 잘 모르겠네요. 위닝에서 능력치가 좋았기에 정이 붙었던 걸까요, 국가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대표팀에게 옮았던 걸까요. 94년 월드컵에서 본 클리스만과 비어호프, 마테우스의 매력에 흠
뻑 빠졌다는 게 가장 확률높은 근거이긴 한데, 사실 그땐 축구에 별 취미 없어서 확언은 못하겠네요. 어쨌든 그 후
녹슨 전차 소리를 듣던, 투박하고 재미없는 축구라는 소리를 듣던 오직 독일, 독일만을 응원해왔네요.
익히 알려졌다 시피 독일은 성적면에서는 어느 남부럽지 않은 팀이긴 합니다. 월드컵 우승 3번으로 브라질-이탈
리아에 이어 3번째, 거기에 준우승도 4번. 유로는 우승 3회에 준우승 3회로 최고의 성적을 거둔 팀이죠. 성적뿐
아니라 꾸준함에서도 브라질 정도를 제외하면 짝이 없을 정도. 스타로 치면 이제동 선수랑 비슷하다고 할까요.
하지만 96년 유로 우승을 끝으로 녹슨 전차 소리를 들으면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98년 월드컵 8강에서
참패(3:0 크로아티아), 유로2000에서 충격의 조4위 탈락, 02년 월드컵에선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대진빨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유로2004에선 또다시 조3위로 탈락하기까지.
하지만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클린스만 감독체레 아래 든든한 캡틴
발락과 분데스리가 최고의 골잡이 클로제, 국대에선 어느 선수 안부러운 포돌스키의 활약으로 비록 4강에서 이
탈리아에게 패배했지만 전차 군단의 부활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요아킴 뢰브 감독 체제로 바뀐 후에 유로2008
에선 준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유럽의 강자 독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2010년 월드컵 지금.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역시 부상으로 인한 발락의 대표팀 탈락이었다고 봅니다. 그동안 독일 국대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던 발락의 탈락은 그 본인이나 독일 국대에는 비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발락이 아닌 외질
이란 신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독일 국대의 시작을 알려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독일 축구를 아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다이슬러란 이름을 기억하실 겁니다. 독일 특유의 조직력을 극대화시키는 패싱 능력에 유연한 개인기와
테크닉까지 겸비한, 가장 독일다우면서 독일답지 않았던 천재. 하지만 부상과 우울증으로 하늘이 내린 재능을
만개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비운의 축구선수를 말이죠.
현재의 외질은 그런 다이슬러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고 봅니다. 물론 아직은 어린 선수이며 정말로 발락, 혹은
다이슬러의 뒤를 이어 독일의 중심을 맡을 인재일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현재까지는 강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외질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테크닉에 속도가 더해진 돌파력,
시야도 넓으며 패싱 능력도 뛰어나고 슛팅도 일품이죠. 말그대로 과거의 지휘관들이 중앙이나 수비진에서 듬직하
게 버텨주면서 지휘를 내렸다면 외질은 그라운드를 빠르게 누비면서 지휘를 하는 신개념 지휘관이라고 봅니다.
(종목은 다르지만 미식축구로 치자면 이동형 쿼터백이라고 할까요)
사실 외질 뿐만이 아닙니다. 현 독일 대표팀의 최고 장점은 젊음입니다. 88년생 외질을 비롯해서 3골 3도움으로
맹활약하는 토마스 뮐러는 89년생, 발락을 대신하여 중원을 휘어잡고 있는 사미 케디라는 87년생, 골문을 지키고
있는 노이어도 86년생(원 국대 대표 골키퍼인 아들러도 85년생), 제롬 보아탱도 88년생이죠. 현재 월드컵에 진출
한 32개국중 가장 젊은 대표팀입니다. 주전은 아니지만 장래가 아주 유망한 토니 크루즈(90년생)와 마르코 마린
(89년생), 바트슈트버(89년생)까지 더하면 사실 지금보다 앞으로 더 기대된다는 말이죠. 게다가 현 대표팀의 중축
인 슈바인슈타이거, 포돌스키, 필립 람도 20대 중후반으로 전성기가 이제 막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다만 고메즈가
클로제만큼 해주질 못한다는게 좀 걱정이긴 하네요.)
뭐, 장황스럽게 떠들어댔지만 간단히 말해 설레발 좀 치고 싶습니다. 지금 치뤄지는 2010년 남아공 대회는 물론,
앞으로 있을 대회에서 한 10년 동안 다시 한 번 세계최강의 전차군단을 보고 싶고, 또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이 물씬 들거든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독일 대표팀을 응원하는 맛이 나는 경기들을 보여줬으면 하네요.
그러니 일단 우승하자 독일!!!
P.s) 현 대표팀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2세들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겠죠. 폴란드 이주자의 아들인 클로제, 포돌스키,
토르호프스키를 비롯해서 터키 이민자의 아들인 외질과 어머니는 독일인이지만 아버지가 각각 튀니지, 스페인, 가나,
나이지리아 사람인 케디라, 고메즈, 보아탱, 아오고, 그리고 브라질 출신이지만 독일 국적을 획득한 카카우까지.
P.s2) 근데 이러다 8강에서 아르헨티나 만나서 탈락하면;;;;;
P.s3) 독일이 우승해서 FIFA컵을 엔케의 묘에 바치는 걸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