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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14 00:29:12
Name   Tigris
Subject   유랑담 약록 #03 / 120604月 _ 면허증










《A》

 칸막이에 정수리를 찧으며 깨어났다. 나는 못 들었지만 아마 쿵, 하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대충 네 시간 정도 잔 듯 했다. 나이트팩 적용시간인 8시간하고도 15분이 더 지나있었다. 기왕 늦은 김에 정신 좀 차리고 느긋하게 나서기로 했다. 어차피 면허시험장이 가까우니 일찍 나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칸을 둘러보았다.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내 칸 주변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나지 않았다. 원래 이 시각이면 이용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건지, 아니면 내가 코라도 골아서 사람들을 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군 복무 시절 ‘후임들이 혹시 내 코골이 때문에 잠을 설쳐놓고 말도 못하는 건 아닐까차라리 선임이 갈구면 마음이나 편한데’ 하며 일조점호 때 눈치를 보았던 것처럼, 나는 화장실에 가면서 다른 손님들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잠을 방해받는 걸 무진장 싫어하다보니, 혹시 남의 잠을 방해했을 법한 상황에서 나는 늘 미안하기가 짝이 없었다.

 세수하고 돌아와 모니터를 켜보니, 사진 전송은 7할 정도에서 에러메시지를 뱉은 채 멈춰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파일을 체크하고, HDD에 임시로 복사해둔 사진을 지운 후 PC를 껐다. 이 넷카페의 회선이 불량한 것인지, 아니면 다음 클라우드 자체가 불안정한 것인지는 다른 넷카페를 몇 곳 들리다보면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을 듯 싶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카운터로 나갔다. 내가 들어올 때의 직원은 보이지 않았고, 성실한 인상의 남직원이 갓 출근한 듯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2,200엔입니다.

 계산이 잘못된 듯 싶었다. 8시간 나이트팩 요금이 1,500엔인데, 겨우 55분 초과로 2,200엔이 되는 건 이상했다. 나이트팩 적용된 게 맞는지 물었더니 직원은 접이식 안내판을 펼쳐보이며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 나이트팩 8시간 1,500엔이구요, 이후 15분당 추가요금이 네 번 붙어서 2,100엔에 샤워실 이용료 100엔까지 해서 2,200엔입니다.

 설명은 합당했다. 과연 안내판 속의 요금시스템대로였다. 나는 순순히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가방을 이륜차에 실으며 요금을 한국식으로 환산해보았다. PC방 8시간 야간정액에 21,000원이고 추가 한 시간에 8,400원. 요금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나중에 나가실 때 기준으로 싼 플랜에 맞춰서 계산해드립니다’라던 점원만 믿은 내 불찰이라 생각하면서도, 생각의 한쪽 구석에서는 자꾸만 ‘날강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짐을 다 꾸리고 보니 식사할 곳을 찾아다니기에는 시간이 급했다.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시치킨(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과 구운 명란 삼각김밥을 사먹고 바로 면허시험장으로 향했다.











 삿포로 면허시험장에 전화를 걸었던 건 3주 전의 일이다.

 나는 2011년 7월 18일 서울 강서 시험장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그로부터 약 보름 후 일본에 입국했다. 국제면허증의 유효기간은 1년이므로,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마지막 365일째까지 돌아다니려면 마지막 보름 정도는 무면허로 다녀야 할 처지였다. 사실 일본에서 운전하며 한 번도 경찰에게 잡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남은 날 정도야 몰래 무면허로 다니는 일도 어렵진 않을 거 같았다.

 허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국인에 대한 평판 같은 건 딱히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차치하더라도, 내 나름의 선은 지키고 싶었다. 비록 한 푼이 아쉬운 처지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면허발급에 드는 비용은 아낄 수 있는 돈이 아니라 마땅히 지불해야 할 돈이었고, 면허 발급에 드는 돈조차 아까운 놈은 운전을 하면 안될 터였다.

 일본의 운전면허취득은 비싸고 까다롭기로 악명높다. 일반적으로 어떤 차종이든 몇 주 정도가 걸리고, 그 비용 또한 수십만 엔에 달한다. 다행히 일본에서는 일본의 운전면허와 동등하다고 인정되는 23개국의 면허를 동등한 차종의 일본 면허를 교부해주는 제도가 있고, 한국 또한 23개국에 포함된다.

 나는 일본 관청의 느긋한 일처리―외국인 등록증을 받을 때도 신청일로부터 보름이 걸렸다―를 감안하여 출발 2주 전쯤에 면허시험장에 전화문의를 했다. 시험장의 여직원은 교환에 필요한 서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면허증용 증명사진과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주일 한국 영사관/대사관에서 공증받는 일 외에는 달리 준비할 건 없었다.


- 그럼 제가 언제쯤 방문하면 됩니까? 내일 가도 되나요?

- 잠시만요. (간격) 6월 4일에 오시면 되겠네요.

  당황스러웠다. 신청하고 3주도 아니고, 3주 후에 신청을 하러 오라니. 이래서야 출발을 할 수가 없지 않나. 그렇잖아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기일을 압축한 게 70일인데, 거기서 더 줄이는 건 곤란했다.


- 너무 오래 기다려야하는군요. 제 비자 기한이 촉박해서 그런데 더 일찍은 안됩니까?

- 송구합니다만 요즘 신청자가 많아서 더 일찍은 힘듭니다.

  곤혹스러웠지만, 생떼를 쓰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내가 잘 모를 뿐 이곳은 이곳의 규정과 순리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룰을 어그러뜨려가며 내 편의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나는 6월 4일에 가면 당일 발급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직원은 서류상의 문제가 없으면 오전 접수시 당일발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알겠노라고 하며 전화를 끊고, 60일이라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별안간 떠나지 못하는 입장이 되자 이상하게 몸이 달고 마음이 불안정해졌다.











  8시 30분 경, 나는 삿포로 운전면허시험장에 들어섰다. 운영은 9시부터라 듣고 왔는데, 시험장 건물에는 이미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국제면허/외국면허’라고 되어 있는 6번 창구로 갔다. 닫혀있는 블라인드 위에 ‘업무시간은 8시 45분부터’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타국의 여권을 들고 있는 사람도 몇 명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 금발벽안의 남성이 창구의 일직선상에 서고, 그 뒤에 일본 여권을 가진 황인 남성이 서기에, 나도 따라서 섰다. 이어 몇 명인가가 자연스럽게 내 뒤에 서며 순식간에 줄이 만들어졌다.

  8시 43분, 창구를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가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올라갔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조용하던 창구 안팎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소란해졌다. 타 창구에 여직원 혹은 여경찰들이 앉아있는 것과 달리, 6번 창구만은 중년의 남성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저는 한국인입니다. 한국의 면허를 일본의 면허로 교환 교부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 예약은요?

- 3주 전에 이곳에 전화문의를 했고, 통화상대로부터 6월 4일에 오라고 들었습니다.

- 어떤 면허를 받으려구요?

- 이륜차 면허입니다. 250cc를 몰 수 있으면 됩니다.

- 한국의 면허증하고 그 공증 서류는 가져왔습니까?

- 여기 있습니다.

- 여권도 주셔야죠.

- 여기 있습니다. 외국인등록증도 드릴까요?

- 주세요.

- 대사관에서 경력증명서는 필요없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 (한국어) 아, 그거, 그거. (일본어) 필요 없어요.

 갑작스러운 한국어보다 일본의 관공서치고는 묘하게 공손치 않은 말투가 놀라웠다.


- 혹시 휴대전화 있어요?

- 네. 있습니다.

- 그럼 여기 서류 귀퉁이에 번호를 적으세요. 확인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릴테니,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이 창구로 다시 오시구요, 혹시 도중에 확인할 게 있으면 휴대전화로 연락할테니까 멀리 가지 마세요.






  면허시험장 건물의 1층은 번잡했고, 2층에는 앉을만한 자리가 없었다. 나는 2층 측면의 베란다에서 하늘이나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9시 40분 경 전화가 와서 6번 창구로 갔다.


- 유 씨? 125cc 이하의 바이크 면허도 필요합니까?

 경찰의 물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125cc 이상도 아니고 이하를 묻다니. 아무래도 이 사람은 내가 한국의 1종 보통 면허에 해당하는 사륜차 면허를 요구하는 김에, 한국에서는 1종 보통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는 125cc 미만 원동기 장치 면허도 함께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 제 면허로는 한국에서 모든 배기량의 바이크를 탈 수 있습니다.

- 그게 어디에 표시되어 있어요?

- (공증서류를 보여주며) 여기 있는 ‘2종 소형’이라는 게 한국의 이륜면허입니다.

- 아, 그래? (옆의 여경찰에게) 한국의 2종 소형이 이륜이었어?

- 이 시험장에도 250cc를 타고 왔는데요. 국제 면허를 보여드릴까요?

- 자료가 없어서 일단 확인을 해야겠는데. 시간 좀 걸릴 거예요. 바이크 면허까지 같이 하면 돈도 더 듭니다.

- 그건 괜찮습니다. (국제 면허를 꺼내어) 여기 보시죠. 한국에서의 면허 내용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 그건 국제면허니까 됐어.

- (됐어? 너 지금 반말했냐?) 일본의 대형 이륜차 면허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250cc를 타고 있기 때문에 해당하는 바이크 면허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 아, 곤란이고 뭐고. 아무튼 이쪽은 자료가 없으면 내어줄 수 없어요. 일단 좀 확인해볼테니 부를 때까지 한동안 기다려요.

 이제 경찰은 은근슬쩍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의 경찰은 옛 관졸의 태도마냥 고자세인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 듯도 싶었다. 나는 잠시 인상을 구기다 알겠다고만 하고 물러났다.

 실은 오전 중에 면허를 받을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 안에 하코다테(函館)에 도달하고 싶었다. 또한 시간적인 여유가 되면, 약간 돌아가는 길이 되긴 하지만, 삿포로 남쪽의 도마코마이(苫小牧)에서 노보리베츠(登別)에 이르는 아름다운 36번 도로를 한 번만이라도 다시 달리고 싶었다. 허나 경찰의 태도로 봐서 하코다테는 고사하고 오늘 안에 면허가 나올지조차 불확실했다.








  다음 전화는 10시 30분 경에 왔다. 6번 창구의 경찰은 나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 오셨습니까, 유 짱, 아니 ○○(이름) 짱.

  ‘짱? 짜앙? 이 아저씨가 그새 미쳤나. 대뜸 이름을 부르는 걸로 모자라서, 산적 같은 사내한테 짱이라니?’ 이제껏 여러 일본인을 만났지만 이런 호칭은 처음이었다. 미간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 그게 말이죠, 알아봤더니 ○○(이름) 씨의 말씀이 정확히 맞더라구요. 바로 접수해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신청서를 저쪽에서 작성해주시고, 저기로 가서 인지를 사서 붙여주세요. 인지 가격은 제가 칸마다 써 드릴테니, 가서 보여주기만 하면 바로 알맞은 인지를 내어줄 겁니다.

  경찰의 말투가 어째선지 무진장 공손해져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 나도 모르게 인상을 과격(?)하게 구겼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업무를 이국인에게 지적받고서야 이해하게 된 상황 자체를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려니 싶었다. 아무튼 악의는 없는 듯하여 나도 공손히 대답했다.


-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바로 써오겠습니다.

 신청서는 두 장이었다. 어째선지 네 자리 비밀번호를 두 개 요구하는 게 특이했다. ‘비밀번호 두 가지를 설정함으로써 면허증의 내용이 보호되므로 반드시 설정해주십시오.’라는 짧은 안내 외에는 아무 설명도 없었다. 인지 가격은 두 서류가 각각 달랐는데, A서류가 시험수수료 3,050엔에 교부수수료 200엔, B서류가 시험수수료 2,200엔에 교부수수료 2,050엔이었으니, 얼추 10만원은 드는 셈이었다.

  서류를 써가자 6번 창구의 경찰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준비해왔다고 말하며 지하철역의 증명사진 기계로 찍은 사진을 꺼냈더니, 그 사진은 못 쓴다고 했다. ‘아니, 댁들이 사진 가져오라며?’라는 생각에 또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경찰이 급히 말을 이었다.


- 아니, 그게, 가져오신 사진으로 면허증을 만들면 내일 발급 되거든요. 다시 오시려면 번거롭잖아요? 하지만 저희 기계로 사진을 찍으시면 이따 2시 반쯤에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사진은 무료에요. 지금 바로 같이 가시죠.

 경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장서서 촬영실로 갔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줄 서 있지 않은 기계로 가서는 쉬고 있던 촬영직원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나는 촬영직원 옆에 있는 금전출납기를 보며 ‘어쩐지 이거 원래는 무료가 아닐 거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하며 14시 반까지 시간을 때울지 생각하다가, 일단은 식사를 하기로 했다. 면허시험장 1층 한쪽에 'GOUKAKU야'라는 식당이 있었다. (한국어로 바꾸면 '합격식당'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쇼유라멘을 시켰는데, 기대 없이 먹었더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식사를 하며 하코다테까지의 길과 묵을 만한 곳들을 찾아보았다. ‘도미토리 시루시루’라는 아주 저렴한 민숙이 있기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두었다.









  식사를 끝냈지만 겨우 11시 10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2층 발코니에 서서 여러 곳에 전화를 걸었다. 홋카이도에 살며 친해진 사람들, 신세진 사람들에게 이제 떠난다고 전화를 했다. 내가 한국어 개인교습을 했던 H 씨와 I 씨가 특히 아쉬워하며 안전한 여정을 기원해주었다.

  오랜만에 집에도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왔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가족들이 일본여행을 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현실적인 준비과정이 마구 떠올라서 골치가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평소 그럴싸한 아들노릇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내가 가족에게 그럴싸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진지하게 검토해볼테니 며칠 기다리시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 발코니에 서서 하늘을 보다가 졸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2시 무렵에는 슬슬 앉고 싶어져서 1층으로 내려왔다. 아침보다는 한산해서 곳곳에 빈자리가 있었다. 나는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가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합격을 기뻐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마치 대학이라도 합격한 것처럼 큰 함성을 쏟아내는 이들도 있었다. 뭐가 저렇게나 기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득 무언가 알 것 같은 지점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성은 선천적으로 운전을 못한다’라는 말이 상식이 되어 있고 ‘김 여사’로 대변되는 멸시도 일반화되어 있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여성운전자에 대한 비하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것은 지난 10개월간 홋카이도에서 운전하며 지내온 나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여성운전자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겪어보기에는, 차를 몰고 다니는 일본의 남녀노소 누구나 운전을 잘한다. 이 ‘운전을 잘한다’라는 것은 물론 기교적인 의미―한겨울, 빙판길이 된 삿포로의 8차선 교차로에서 4WD 경차를 자연스럽게 미끄러뜨리는 와중에 재빨리 카운터를 넣어 적절히 돌아나가는 할머니를 봤을 때는 솔직히 감탄했다―도 없잖아 있지만, 그보다는 모두가 안전하고 겸손하게 운전한다는 의미가 크다. 다른 도시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삿포로에서는 모두들 신호, 차선, 속도제한 등 사소한 규정을 잘 지키고, 신호를 두세 번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끼어드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방향지시등을 철저히 사용하고, 여간해선 경적을 울리지도 않으며, 엉뚱한 주차로 교통 흐름을 막는 일도 일체 없고, 무엇보다 난폭운전을 운전 숙련의 척도로 삼는 나쁜 인습이 없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운전을 잘하게 했는지 나는 늘 궁금했는데, 어쩌면 저 합격의 함성이 그것을 설명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의 면허체계에도 문제점이야 많겠지만(특히 면허를 따는 비용이 지나치게 비싼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지만), 면허를 좀처럼 내주지 않는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허 따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운전이 충분히 능숙해지기 전에는 면허를 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성이 선천적으로 공간능력이 떨어지든 말든, 어쨌거나 충분히 운전을 잘하는 사람에게만 면허를 준다면 개인의 선천적인 능력차는 도로사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게 옳다. 면허를 취득하고도 도로연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스템일까. 내가 운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한국에서 두 곳의 운전학원을 다니며 대여섯 명의 강사를 만나봤지만, 그들은 합격을 위한 짤막한 요령 외에는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무엇을 위한 건지, 계기반은 각각 무엇을 표시하는 건지, 사이드 미러와 리어 미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조차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런 운전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미러를 안 보고 다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그런 이들에게도 면허증은 나온다. 그것이 1톤 이상의 쇳덩어리를 60km/h 이상의 속력으로 휘두르고 다닐 자격이며, 그 쇳덩이가 언제 우리를 찍어눌러 분해된 고깃덩어리로 만들지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면,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극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큰 사고가 벌어진 후에야 겨우 위기감을 가진다.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너도 나도 따지고 들지만, 사실 합리성을 앞세운 그 따짐들의 본질은 감정의 배설인 경우가 더 많다. 공분의 표적을 찾는 것이다. ‘김 여사’를 위시한 미숙 운전자들이 일으켰던 사고에 대한 비난은 많지만, 왜 그런 미숙 운전자들이 생겨났는지, 왜 우리는 그들이 도로에 나오도록 내버려뒀는지에 대한 자성은 드물다. ‘이상한 자가 있어서’ 혹은 ‘나쁜 놈이 있어서’ 그런 사태가 생겼다고 믿는 게 아무래도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만큼 지독한 대참사와 희생이 생겨야 겨우 자성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세태가 실로 유감스럽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계통없이 이어가고 있는데, 급기야 한 무리가 신난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가더니 한 여성에게 헹가래를 쳐주었다. 힘에 부쳤는지 그리 높게 던지진 못했으나, 그들이 무척 기뻐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14시 30분이 되어 6번 창구로 찾아갔다. 아까의 중년 경찰은 자리에 보이지 않았고, 대신 여경이 면허증 다발에서 내 것을 찾아주었다. 면허증을 받자마자 나는 주차장으로 걸어나와 지체없이 그곳을 떠났다. 가능하면 해가 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가고 싶었다.














  36번 도로로 가는 여정은 이미 무리였다. 나는 얌전히 구글 네비게이터를 따르기로 했다. 구글 네비게이터는 5번 국도를 230km 쯤 직진하라고 심플하게 지시했다. 철마는 어제도 그제도 달렸던 길을 다시 거슬러올랐다. 오타루(小樽)를 지나 ‘우주 온천’이 있던 요이치(余市)에 도달해서야 길은 남쪽으로 꺾어졌다.












《B》




 언젠가부터 길의 정면에 산이 보였다.











 산은 점차 가까워졌다.








《C》



 오른쪽에 있던 산이 슬슬 왼쪽으로 옮겨간다 싶더니, 어느샌가 나는 산을 지나쳐있었다. 산을 안내하는 미치노에키(道の駅)에 도달해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요테이 산이라는 이름인 모양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캔 마시며 산을 돌아보았다. 가만 보니 꽤나 예쁜 산이었다.













 좀 더 달려가니 적막한 느낌의 들판이 있었다.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날벌레 떼가 달려드는 통에 오래 서있지는 못했다.







 들판을 지나 조금 더 가니, 갑작스러운 안개가 정면에 깔린 게 보였다. 마치 투명한 벽이라도 세워져 있는 듯 경계가 뚜렷한 안개였다. 안개의 영역에 들어서기 직전 좌우를 둘러보았을 때 저 멀리까지 일자로 뻗어있던 안개의 벽은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안개로 들어가자 10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상향등과 비상등을 켜고 헬멧의 실드를 올렸다. 잠시 후 서행하고 있는 차들의 행렬이 보였다. 안개는 대략 30분 정도 이어졌다. 돌입할 때와 달리 안개의 끝자락은 평범하게 바람을 타고 흩어지고 있었다.








《D》




  안개를 벗어난 지 5분 정도 지나자 난데없이 바다가 나타났다. 아까만 해도 오타루 옆을 지나며 홋카이도의 북쪽 바다를 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남쪽 바다까지 도달한 것이다. 18시 40분 경이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잠시 바다를 보았다. 그물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아 어촌이 가까운 듯했다.








《E》

 해안을 따라 5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해가 갓 넘어가고 달이 겨우 올라간 하늘은 흐린 보랏빛이었고, 동남향으로 바라본 북태평양은 감색으로 번들거렸다. 시야가 맑아서 수평선까지 모든 풍경이 또렷하게 보였고, 멀리 바위로 된 해안선을 따라 좌로 느슨히 굽어진 땅에는 소박한 별장들이 몇 채 서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고혹적인 풍경이었다. 평소라면 몇 번이고 차를 세워 사진을 찍었겠지만, 어째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노을을 특별히 아끼는 과객은 알았다. 이 풍경을 덮고 있는 황홀한 빛은, 낮과 밤 사이를 스쳐가는 찰나라는 것을. 이번만큼은 사각의 프레임에 이 풍경을 사본화하기보다 풍경 속으로 흘러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계속 달렸다.

 밤의 어두움이 뚜렷해지고 굽이치는 해안선의 풍경도 끝난 후에야, 나는 풍경을 응시하며 달려가던 자신의 시선 자체가 그 풍경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1인칭의 풍경이었고, 설령 어딘가에 삼각대를 세웠더라도 나는 그것을 3인칭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F》



 19시 40분 무렵, 해안을 따라가는 길이 끝나고 남쪽으로 길을 틀어 내륙을 향했다. 모리마치(森町)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미치노에키가 있기에 잠시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른 김에 시원하게 세수를 했다. 자판기에서 미츠야 사이다를 한 캔 뽑아 마시며 지도를 보았다. 하코다테에 도달할 수는 있을 듯 싶었는데, 잠자리가 불확실했다. 미리 점찍어둔 야외 캠프장은 하코다테 시를 지난 곳에 있었는데, 입장시각이 20시까지였기 때문에 이미 오늘은 가기 힘들었다. 나는 지금 쉬고 있는 미치노에키에서 텐트를 펴고 잘 생각을 해보았다. 먹을 건 없지만 마실 것은 있고, 화장실이 있으니 세안과 양치 정도는 가능한 환경이며, 인가에서도 멀고 화장실을 제외한 건물은 영업을 마쳤기 때문에 딱히 직접적인 민폐도 끼칠 게 없어서 노숙하기엔 상당히 좋은 환경이었다. 가만보니 주차되어 있는 화물차, 승합차들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허나 막상 여기서 오늘을 마감하려고 생각하니 남은 체력이 아까웠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겨우 다섯 시간밖에 다니지 않은 것이다. 하코다테에 가는 편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득일 듯 싶어진 나는, 아까 메모해둔 하코다테의 민숙 ‘도미토리 시루시루’라는 곳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수화기에서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늦은 시각에 실례합니다만, 오늘 머물 방이 있습니까?

- 있어요. 언제쯤 오십니까?

- 그게, 지금 하코다테로 가는 도로 위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 좀 늦어도 괜찮으니 조심해서 오세요. 하코다테 들어서면 다시 연락 한 번 주세요. 그때 길을 안내해줄게요.

- 네, 감사합니다.

 구글 네비게이션에 ‘도미토리 시루시루’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다시 남쪽으로 달렸다.




 하코다테로 진입하는 길은 고속화도로였다. 허나 제한속도가 올라가도 길이 편도 1 내지 2차선 정도라서 시속 80 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숲과 산 뿐이었던 도로 주변에 슬슬 인공적인 불빛이 조금씩 늘어나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커먼 덩어리가 도로에 튀어나왔다. 얼핏 너구리처럼 보였으나 너구리치고는 너무 커다랗던 그것은, 내 차선 한가운데서 헤드라이트를 보며 굳어버렸다. 이대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급브레이크를 잡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나는 황급히 오른팔에 힘을 주어 핸들을 왼쪽으로 밀치고, 동시에 오른발 안축에 무게를 한껏 실으며 몸을 우측으로 바짝 기울였다. 뒷바퀴가 조금 밀리긴 했지만 차는 아슬아슬하게 동물의 옆을 비껴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만간 타이어의 상태를 한 번 점검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G》

 ‘도미토리 시루시루’는 하코다테 시내 주택가에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처음에는 찾지 못해 헤매다가 전화통화를 하고나서야 겨우 4절지만한 간판을 알아보았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머리에 쓴 두건 아래로 백발이 엿보임에도 곧게 편 등 덕분인지 노쇠한 느낌은 없는 영감님이 집 앞에 마중을 나왔다.


- 전화한 게 자네인가? 어서 오게. 어디서부터 온 건가?

- 삿포로에서 오는 길입니다. 혹시 주차공간이 있을까요?

- 저 차고를 쓰게.

 나는 가방들을 현관에 내려놓고 이륜차를 차고에 넣었다.


- 음? 번호판이 특이하구만?

- 한국에서 와서 그렇습니다.

- 한국? 그럼 한국인인가?

- 네.

- 지난 여름에도 한국 여학생들이 여럿 왔었지. 한국인들은 에너지가 넘쳐서 참 좋아. 근데 올해는 후쿠시마 때문에 어디에서든 손님이 참 없구만. 이젠 다 지난 일이라 괜찮은데 말이야. 저쪽은 그렇다 쳐도, 하코다테 쪽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는 영감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국을 포함한 어디에서나―심지어 유럽인들조차― ‘옆동네까지는 끝장났지만 여기는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을 숱하게 들어오며, 이미 그런 생각들은 합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에 굳이 말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동일본 대지진,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그들의 삶과 그 터전을 쉽사리 모욕하기에 나의 합리란 너무도 보잘 것 없었으며, 또한 그들의 믿음을 부정하는 말을 나는 책임질 수 없었다.




 ‘도미토리 시루시루’의 운영은 2층짜리 홀로 사는 주인영감님의 소일거리인 듯 보였다. 2층의 여러 방에 2층 침대를 여럿 놓아두고, 2층 거실에 다양한 지도나 하코다테 정보 등을 모아둔 담화실로 만들어 두었다. 숙박료는 1박 1,700엔(1주일 선불시 10,000 엔)으로 충분히 저렴했지만, 요금이 무색할만큼 아늑하고 깨끗했다. 여러 문화권의 장식품이 집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감님 또한 소싯적에 여러 곳을 다녀본 사람인 듯했다.

 나는 영감님에게 근처 편의점 위치를 물어 도시락을 사와 배를 채우고, 샤워를 한 후, 방에 들어가 침대에 퍼졌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나는 가족여행에 관해 생각했다. 내 여정은 과정이 어떠하든 돌아갈 배편 때문에라도 오사카에서 끝날 터이니, 칸사이를 가족들과 함께 도는 게 가장 적절할 듯 싶었다. 나는 밤늦도록 눈치보지 않고 배터리가 다 될 걱정도 없이 넷북을 두드리며 가족여행의 계획을 세워보았다.




(계속)



* kimbill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7-2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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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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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00:50
좋아요3
요즘 활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무슨 글이든 진득하게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자연스럽게 여행하는 분위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일본에 다녀와서 그런지 일본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늘 잘 보고 있습니다.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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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01:00
늘 덧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마음에 안 차는 글만 나와서 쓰다보면 화도 나지만, 읽어주는 분이 계시니 계속 힘낼 수 있을 듯 합니다.
곧내려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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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09:13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클릭해서 연재하시는 줄 모르고 읽었는데 재미있네요.
조만간 정주행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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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10:57
좋아요
웅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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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11:21
유랑담 잘 보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렇게 다녀오시는데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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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12:00
질문의도에 맞는 대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구상부터 출발까지(루트 설정, 자금 마련, 정보 수집, 비자 취득, 면허 취득, 이륜차 구입, 여행용품 구입, 차량일시수출입 관련 준비 등)는 3년 반 정도 걸렸고, 일본에는 1년간 있었습니다. 본 연재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거리 여행은 60일 정도 걸렸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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