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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1/29 09:37:14
Name 트린
Subject [내왜미!] 2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6)






그들은 구로역에서 수성의 집까지 걸어오면서 주로 2차 세계 대전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성은
2차 세계 대전 군사 소설을 쓰려는 꿈을 안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꽤 적극적으로 공부했는데
도 네 사람의 지식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폰 파울루스를 바로 옆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하
고 흐루시쵸프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감(물론 표트르는 제외)을 나타냈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
료에 나오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존재하는 다른 조각에 비춰 보면 절대로 허풍이 아니
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나 가능할 너무나 솔직한 감회가 묻어 나와 놀랄 지경이
었다.  
이런 높은 수준을 가능케한 것은  언어가 해결되어서 영문권 이외의 독일, 소련의 논문집을 팠
든지 초 마니아여서 참전 용사들 협회를 돌아다니면서 인터뷰질을 했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
면…….
수성은 배울 게 많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좋아했다.
오면서 가게에 들러 간식을 샀다. 갹출하려고 수성이 지갑을 꺼내자 그들은 말리면서 그가 장
소 제공자인데다 게임 주인이기도 하니까 회비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앞으로도 계
속. 꽤나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치였다.
치사해 보일까 봐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이러한 대우를 꿈꾸고 있었기에 그들이
더욱 좋게 느껴졌다.
수성의 집은 넓은 옥탑방이었다. 그는 집에서 따로 나와서 살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 그들은 현관에 멈춰 서서 머뭇거렸다. 수성은 낯선 곳을 거북해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하고 들어오시라고 정중히 권했다. 네 사람은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발을 떼지 않았다. 이
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차에 오면서 그들 중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표트르가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두 번만 같은 말씀을 더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어떤?"
"초청의 인사를요."
"무슨 관습 같은 건가요?"


표트르는 쑥쓰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하나같이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네. 말하자면."
"좋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뭘."


그들은 세 번 들어오라는 말을 들은 후 감사를 표하며 수성의 옥탑방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외투와 가방을 단정하게 정리한 후 서가에 꽂힌 TRPG 관련 서적과 보드 게임들을 둘러보며
관심을 표했다.


"크툴후의 부름에다 스파이크래프트. 세븐즈 시라니 수성 씨도 어지간한 마니아군요."


표트르는 감탄하면서 구판 섀도 런 모스크바 소스북을 뒤적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가 좋
아하는 TRPG 시스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편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원작으로 삼은
TRPG 시스템 뱀파이어 머스커레이드 이야기가 나오자, 표트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게임 시스템은 새로운 시도인만큼 높이 삽니다만 그 뱀파이어 설정들은 악취미의 표상이라
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어이없는 인간적 설정들인지 몰라요. 그나마 진실을 잡아
낸 것은 노스페라투 설정 정도랄까요?"


그는 단순히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수성은 머릿속으로 이 친구가 어떻게 진실임을 단언하는지, 왜 이리 흥분하는지 궁금하게 여
겼다.


'자기는 부인하지만 사실은 극성 스토리텔링 시스템 혐오자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전투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TRPG 시스템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표정에서 드러났나 보다. 말이 끊기면서 약간 어색한 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구원의 손은 좀 떨어져 있던 슐츠에게서 왔다.
그가 표트르에게 말을 걸었다.


"TRPG 말고 보드 게임 쪽도 보랑께. 토탈러 크리그도 있당께로."
"어, 정말?"


표트르는 책을 꽂고 슐츠 곁으로 다가갔다. 둘은 꺼내서 칩과 카드, 지도판 상태를 살펴보고는
단박에 이렇게 말했다.


"수성 씨, 이거 사 놓고 하지 않았죠?"
"네. 영어에 곤란을 느껴서요."


슐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걱정 싸게싸게 내려놓으쑈. 긍께로 우리가 거시기를 거시기하겠다 이 말이시."


거시기가 두 번이나 들어갔지만 수성은 단박에 알아듣고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칭링은 게임도 게임이지만 수성의 군사 관련 서가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라이프 2차
세계 대전사를 훑어보면서 그녀는 가끔 수성에게 눈웃음 지었다. 별반 뜻이 담겼을 리 없지만
수성은 왠지 가슴이 무언가에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정신이 몽롱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자, 이제는 게임을 할 시간. ASL 기본팩 첫 시나리오는 1942년 10월 6일 스탈린그라드에서 시
작한다.
독일군은 5일 드제흐진스끼 트랙터 공장 안의 소련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려 든다. 소련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308 소총 사단을 동원하였다. 해서 고리 중 일부인 독일군의 십수 개 분대
가 오히려 포위를 당하는 형국인 시나리오였다.
수성과 표트르가 소련군, 나머지 사람들이 독일군이었다. 시나리오 카드에 있는 대로 분대를
배치하는 도중 표트르가 러시아 어(아마도. 러시아를 잘 모르는 수성은 그렇게 짐작하였다.)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슐츠가 대번에 안색이 변해 표트르만큼 유창한 러시아 어로 되받
아쳤다. 그는 연거푸 켈소 상사라는 독일군 분대장의 부대 칩을 가리키면서 장광설을 펼쳤다.
표트르도 지지 않았다. 둘은 이제 게임 칩 배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연거푸
주고받았다. 표트르는 말하면서 동작이 무척 큰 친구였다. 그에 반해 슐츠는 꼿꼿이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말싸움은 한이 없었다. 칭링은 한숨을 쉬고는 몇몇 여자들이 흔히 지루할 때 하는 것처럼 가방
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수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큰맘 먹고 말수가 극도로 적은 스티븐 발러
에게 물어보았다.


"죄송합니다만 대체 저 두 사람 왜 그러는지요?"


그는 수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강렬한 눈빛이었다. 무슨 투과 광선이 아닐까 싶
을 정도로 눈빛이 마음 깊숙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망설이던 발러는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슐츠가 당시에 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표트르가 목격했다는군요. 슐츠 본인은 부인하
지만요."
"그렇군요. 애증이 깊은 사이군요."
"그런 셈이죠."


발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길래 무심코 수긍했던 수성은 곧 얼어붙었다.


'당시'라니?


ASL의 높은 명성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컴 게임이 나오기 전에 수많은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게임 시스템의 우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료를 충실히 참고한 시나리오가 더욱 높
은 비율을 차지했다. 군사 마니아 상대로 역사 속의 전쟁이었다는 설득만큼 그들의 주머니를
털기 쉬운 것이 없었다. 제작사 아발론 힐은 이런 강점을 놓칠 허술한 회사가 아니었다. 고로
게임 안의 독일의 389 보병 연대와 소련의 308 소총 사단의 전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이라면 저들은 과연 '무엇'인가?
수성은 대체 이게 무슨 도깨비 짓인지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혼란한 눈은 두리번거리다가
또 한번 놀랄 만한 거리를 찾아내었다. 발러는 그런 그를 미안해하는 눈치로 살폈다.
칭링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빨대를 꽂았다. 자세히 보니 빨대가 꽂힌 물건은 바코드가
찍힌 전혈 헌혈 전용 수혈팩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가 보는 앞에서 빨대를 쪽쪽
빠는 것이 아닌가!
송곳니.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세 번의 초청 인사 후 방문.
인간의 픽션에 대한 조롱과 분노.
그리고 피.
왜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못 알아차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밤의
대평원 위에 100미터짜리 할로겐 등을 둘러 밝게 밝힌 건물이 서 있는 것처럼 명명백백했다. 그
러나 현실감이 부족한 예제처럼 지금 이 상황도 현실감이 빵점이었다.
수성은 대체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도라도 할까? 무신론자인만큼 신에게
빌 수도 없다. 물론 십자가도 없다. 냉장고의 마늘 범벅인 김치는 어제 야식으로 라면 끓여 먹으
면서 전부 동이 났다. 그래서 그는 계속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공포와 당황으로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비교적 뚜렷하게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대체 무슨 짓이야!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배고팠다고. 그리고 왜 나만 가지고 난리야. 저기 저 둘 봐. 이빨 드러내고 상대방 만행을 비난
하면서 싸우는데 알아차릴 때가 되었잖아. 너도 그래서 언질을 준 거 아냐? 저 친구가 둔해서 못
알아차리고 답답하니까."


발러는 안경을 추스리며 맞받아쳤다.


"뭐든지 순서가 있는 법이야. 외과의사가 수술할 때 마취부터 하지, 바로 메스를 들어 배를 째던
가? 억지는 그만해."
"……쳇. 나 네 몫의 도시락까지 다 먹을 거야."


칭링은 말릴 틈도 없이 번개같이 발러의 가죽 서류 가방을 채서 구석으로 도주했다. 발러는 따라
가지 않고 머리를 짚으며 탄식 조로 외쳤다.


"칭링아, 칭링아. 해츨링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
"메에롱."


발러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수성을 쳐다보았다. 그는 측은한 눈길이었다.


"죄송합니다. 충격이 심하셨죠?"
"아, 네."
"저희들은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네에."
"인간들이랑 플레이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그렇군요."
"특히 마스터를 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개성들을 지니고 있어서 더 좋고요."
"오호라."


어설픈 대화 다음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들은 무언가를 애원하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무언
의 교차가 계속되었다.
수성은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마스터가 사라졌다고 했다. 정체를 알아채자 그들이 쪽쪽 빨고 화성에다 버렸을까? 그럼 그 마
스터는 여대생? 좋겠다. 여대생이 마스터라니 나도 그런 팀에 들어가고 싶다. 향긋한 냄새가 감
돌겠지. 쟤네들은 도시락을 싸 왔다고 하면서 전혈 혈액 팩을 가져왔다. 사 왔을까? 살 곳은 우
리나라에서는 단 한 군데뿐인데. 정말이지 적십자는 비리의 온상이다. 확 조져 버려야 한다. 그
나저나 나도 배고픈데 쟤들은 과자랑 콜라만 샀다. 간식을 책임지는 것은 좋은데 자기네들이
그런 걸 안 먹어버릇해서 그런지 몰라도 뭐가 환영받는 간식인지 모르는군. 아까는 어색해서 아
무 말 안 했지만 나중에 기회 봐서 만두나 김밥, 피자가 좋다고 말해야겠다. 통닭은 내가 싫어하
니까 곤란하다. 가만. 저들은 맥주를 먹을까? 보드 게임이나 TRPG하면서 맥주 마시면 그것도 죽
이는데. 그런 즐거움을 모른다니 동정이 간다.'


그는 3초 안에 이 모든 생각을 쏟아 내고는 자기가 놀랐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자신만을 바라
보는데도 여유가 있었다. 사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수성은 문득 아주 어렸을 적에 동네 여자
애들과 하던 혁신적 소꿉놀이를 떠올렸다. 아빠, 엄마, 아기로만 이뤄진 표준 캐스팅에 난데없는
'아기 친구로 변장한 도깨비 군단'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 참신하고 번뜩이는 요소로 인해 한동
안 수성은 동네 소꿉놀이 판에서 퇴출을 당한 적 있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그때와 뭐가 다른가?
인간은 유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공격성, 사회성과 함께 유희는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3대
감정이다. 주식이 아이들의 가짜 돈과 뭐가 다른가? 결혼과 소꿉장난이 뭐가 다른가? 다른 것은
오직 어린아이는 환상 속에서, 어른은 실제에서 상대방 내지는 사물을 소유한다는 점일 뿐 욕망
의 발현은 어린아이 때부터 바뀌지 않고 규모만 커지면서 이어진다.
수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도깨비 군단이랑 놀아 볼까.
그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분위기 깨지 말고 이제 플레이 들어갑시다. 칭링 씨. 그거 바닥에 흘리면 안 돼요. 잘 안 지워진
다고요. 표트르 씨, 슐츠 씨. 마침 다른 편이니까 서로를 깨려고 애써 보세요. 감정이입도 백 퍼
센트겠다 딱 좋잖아요?"
"그, 그럼."


표트르가 반기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임 약속 잘 지키지, 간식 사 주지, 영문 번역해 주지, 매너 좋지, 지식 풍부해서 배울 거
많지, 밤샘 가능하지 뭐가 불만이겠어요."
"아따, 역시 수성 씨는 싸나이 중의 싸나이여. 내가 저런 사람 좋아 디져 분당께. 자, 싸게 싸게
하드라고. 덤벼. 덤벼 보드라고, 이 쏘비에뜨 돼지 새……"
"단."


그는 이것 하나만은 단단히 주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가로막았다. 다시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괜히 말하나 싶었다. 아무 생각 없다가 그 말을 꺼내자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지 않은
가. '우리 이 선을 긋고 서로 넘어오지 말고 잠만 자자'라든가 뭐 그런 거. 하지만 이 친구들은 약
속은 지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신사적이었다. 그렇다면 미리 약속을 받아 놓는 것
이 좋았다.  


"밥은 배불러 먹고 오세요. 간식을 가져와서 드셔도 좋지만요. 부탁 드립니다."


뱀파이어들은 호쾌하게 웃고는 시선을 다시 보드 게임 칩으로 돌렸다. 밤이 깊어졌다. 그들은 함
께 주사위를 굴렸다.




*



수성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은실의 소감은 단호했다.


‘뻥치시네!’


세상에 이런 뻥이 있을 수 있나! 아버지는 평범한 우주비행사요, 어머니는 밝힐 수 없는 평범한
한국 유일무이한 직업을 가진 주부요, 남동생은 만화나 좋아하는 덜 떨어진 남자애를 둔 은실은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면이 있었다.


‘세상에 뱀파이어가 어딨어. 백 번 양보해서 있다고 쳐. 있다고 치자고. 뱀파이어들이 할 일 없
이 보드 게임이랑 TRPG란 걸 하겠어?’


영원히 사는 자들인 만큼 편안히 살려고 뒤에서 세상을 지배하면서 음험한 음모를 꾸미고 지들
끼리 치고 박고 싸우느라 정신없지 한가하게 보드게임?


‘왜 아주 하이랜더(*불사신이 주인공인 1986년 영화.)도 있다고 하지. 뱀파이어 있으면 늑대인
간도 있고 늑대인간이 있음 돼지 삼형제도 있고.’


은실은 수성의 정신 건강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현실과 망상을 구분 못 하고, 게임에나 나
올법한 설정을 탄탄하게 살을 붙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이미 증상이라고 부를 단계는 넘어선
중병이었다.
그러나 짙은 경멸이 포함된 확신을 품고 있음에도 은실은 대놓고 구박할 수는 없었다. 주위 다
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미 듣거나 본 이야기라는 듯 동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은실은 용기를 내서 그나마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원에게 물어보았다.


“수성 씨 얘기에 나오는 뱀파이어들 중 만나본 사람, 아니 뱀파이어 있으세요?”
“네. 칭링요. 예쁘더라고요.”


양익도 끼어들었다.


“전 표트르요.”


……뻥치시네!
여기는 거짓말쟁이 아니면 정신병자들뿐인가? 은실은 외눈박이 나라에 두 눈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수성은 그가 갖고 싶다, 갖고 싶다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사온 것이라는 선물들을 하나둘 상자에서 까고 있었다. 곧 수성이 손길을 멈추고 소리쳤다.


“와! 원아, 이 귀한 것을.”
“마음에 드세요?”


수성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영화 <라이언 킹>에서 원숭이 현자가 심바 들 듯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배경음악으로 <서클 오브 라이프>가 안 깔리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음에 들다마다! 배틀 머그컵이라니!”


은실은 얼핏 보고 소구경 포탄의 탄피를 왜 선물하나 싶다가 머그컵이라는 말에 경악했다. 수성
이 든 국방색 머그컵은 척 봐도 굉장히 튼튼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컵에는 3면에 소총
에 레이저 포인트나 라이트 플래시 같은 부가장치를 달 수 있는 레일이, 손잡이로 기능할 마지막
면에는 M-16 소총에서 막 떼어온 듯한 소총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이름이 그 모양인 것
같았다.
턱수염에 꽁지머리를 한 근육질 남성이 흥에 겨워 밑면이 톱니 모양으로 들쭉날쭉한 길이 30센
티미터, 폭 15센티미터 금속 흉기를 아무렇게나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위험성을 느낀 은실이 수
성의 정면에서 벗어나려고 방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가운데 양익이 투덜거렸다.


“너무 그것만 좋아하네요. 내 선물도 확인 좀 해 봐요.”
“아, 네.”


수성이 그가 건넨 상자를 뜯다가 이번엔 막 웃었다.


“세상에.”
“자, 약속을 지켜요.”
“진짜요?”
“네. 진짜.”


수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 속에서 젖소 무늬가 그려진 옷을 꺼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에 은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환호와 함께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



같은 시각 X는 고개를 한껏 쳐들어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4층 옥탑방을 바라보았다. 방범등이
환하게 켜진 T자형 골목에서 아래 삐침으로 막 들어온 참이었다.
X는 들고 있던 가방을 땅에 내려다놓고 주위를 살폈다. 바로 보이는 다세대 주택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T자형 위의 골목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X는 반장을 쐈던 소음 권총을 재빨리 꺼내 방범등을 쐈다. 주위에 편안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X는 가방을 열어 마디마다 꺾인 지네처럼 접혀 들어 있던, 튼튼한 검은색 금속재질에 검은색 고
무로 감싼 2미터짜리 봉 하나를 다른 2미터짜리 봉에 연결했다. 8개를 연결하자 4층 높이를 충
분히 커버할 수 있는 16미터짜리 봉이 되었다. 땅에서 가까운 봉에는 두툼한 고무받침, 맨 위로
올라갈 봉에는 소포 꾸러미를 넣을 만한 알루미늄 재질의 금속 상자가 달려 있었다.
X는 봉을 다 조립하자 이번엔 가방에서 C4라고 적힌 플라스틱 폭약 네 개를 꺼내 도폭선을 꽂고,
핸드폰으로 작동하는 무선 기폭기를 장착했다. 이렇게 정성들여 마련한 죽음의 생일 선물을 금
속 상자에 넣으려는 참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 누구니?”


인기척이 전혀 없는 자였다. 자신을 100퍼센트 믿으면서, 극도로 예민한 X에게 이는 기습과도 같
았다. 그 또는 그녀는 등 뒤로 도는 가운데에도 품속의 권총을 옷 속에서 곧추세웠다. X의  눈앞
에 있는 사람은 백옥같이 피부가 새하얀 여자였다.


“너 뭐하니?”


새하얘도 너무 새하얘 눈앞의 여자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이상한 것은 눈동자
였다. 빛이 거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처럼 녹색으로 번뜩였다.
X는 잔뜩 긴장하면서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나?”
“그래, 너. 수성이랑 아는 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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