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5/24 17:49:50
Name 王天君
File #1 gangnamyeok16.jpg (243.4 KB), Download : 54
Subject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누군가가 떠나버려서 슬픕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나 같기에, 내가 아는 누구와 같기에,
나는 모르지만 오늘 우연히 마주칠 누군가와 같기에
우리는 지금 슬프고, 슬퍼해도 됩니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누군가의 흑백사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사진 속 그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상주가 누구인지
부조금은 어디다 쓸 것인지
여기서 절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육개장 고기가 상한 건 아닌지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은 그를 만나러 갑니다.

너무 걱정마세요.
당신은 늘 입던대로
단정하게, 조금 후줄근하게, 튀지않게 차려입고 갑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묻지 않습니다.
어째서 넥타이를 하지 않았는지
양말 색깔은 그게 뭔지
부조금은 얼마를 낼 것인지
진짜로 추모하러 온 건 맞는지
의심의 눈초리도, 서늘한 미소도 보내지 않습니다.
당신은 침통한 얼굴을 하고서
조금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살짝 뻣뻣하게, 각이 진 인사를 나눕니다.
당신은 그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언어가 아닌 채로 맴도는 많은 생각들
한 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그는 다 알아듣습니다.
그래, 알아요.
와줘서 고마워요.

다 똑같습니다.
당신은 가서 부조금을 낼 필요도
격식을 차려 입을 필요도
허리 굽혀 인사를 할 필요도
별로 끌리지 않는 끼니를 해치울 필요도 없을 뿐이에요.
당신도, 그도 서로를 잘 모르지만
괜찮아요.
당신이 슬프고, 당신이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그 감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곳을 찾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시끄럽죠.
그곳을 가기까지 큰 소음이 일고 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괜찮아요.
그 수많은 소리 가운데에서
굳이 뭔가를 건져내지 않아도 됩니다.
말했잖아요.
그 곳에서는
당신에게 아무도,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고.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걸 다 들으려 할 수록
점점 망설여질지도 몰라요.
잠깐만 귀를 막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생각해볼까요.
만난 적 없는 그가, 그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를 만나러 갑니다.
그 곳에 서있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을 말입니다.

저도 그랬어요.
우리는 이미 다 그렇게 만나러 갔었죠.
무슨 일이 일어났고 뭐가 어떻게 되가는지
다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만나러 갔어요.
슬퍼서 찾은 그 곳에서
슬퍼하는 많은 이들을 만났고
그렇게 슬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어쨌건 만나러 갔고 슬퍼할 수 있었죠.
눈 속에 담기는 이들이 모두 슬퍼보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신은 슬퍼하고 왔습니다.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만나기 전의 생각들
만나고 난 후의 생각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들
그를 만나는 동안에는 떠올리지 못할 생각들이에요.
그래서, 당신은 그를 만나러 가요.
그리고 거기서 그를 찾습니다.

당신이 찾은 그 곳에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지금, 거기에 없으니까요.
아마 기다려도 오진 않을 거에요.
그러든말든 당신은 없는 그를 향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이 하고 싶었나요?
그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는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는 사이니까, 아마 물어볼 게 많을 겁니다.

야속하게도, 별 답을 안 해줄 겁니다.
어차피 알고 한 질문들이니까 별로 서운하진 않을 거에요.
당신이 누구고 그 어떤 질문을 했건
얼마나 긴, 짧은 이야기를 했건
당신은 딱 두가지 대답을 듣게 될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됐다고.
다시는 누구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일수도, 혼잣말이 아닐 수도 있어요.

이미 알고 있는 답이니 만날 것까진 없다 할려나요.
만나서 물어보면, 조금 다를지도 몰라요.
어쩌면, 만의 하나,
슬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나자마자, 만나고 난 후, 아니면 더 늦게라도요.

이상한 이야기죠.
슬퍼서 만났는데, 슬퍼할 수 있게 된다니.
슬픈 것과 슬퍼하는 건 다를지도 몰라요.
우리는 슬픈 일을 많이 겪지만
늘 잊어버리고 살아요. 슬펐지만, 슬퍼하진 않고 흘려버리죠.
어떨 때는 슬프지 않아도 슬퍼하곤 해요.
나 아닌 다른 이의 슬픔에
나는 별로 안슬프지만, 슬픈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슬퍼해주죠.
아마 당신이 찾은 그 곳은
슬프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은, 슬퍼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러길 바래요.
당신이 만나려 한 그도
슬픈 모습보다는 슬퍼하는 모습을 더 고마워하진 않을까요.
슬퍼하는 것으로
슬퍼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 지도요.
슬퍼할 때를 놓치면
뒤늦게 슬퍼지고, 그 때 가서 슬퍼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슬퍼해주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는 게
나중에 혼자 슬프기만 한 것보다는 더 나아요.
그래도 슬퍼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덜 슬프거든요.

슬퍼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서 슬프다면
마음껏 슬퍼해버리세요.
오로지 그와 당신, 둘만의 대화를 나누세요.
그리고 우리끼리 슬퍼하도록 해요.
슬프고 안 슬프고를 굳이 가리려 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는 이가 있고
슬프지 않은 이들은 슬퍼하는 당신을 어쩌지 못해요.
슬퍼하는 당신을 통해 내가, 우리가, 그가
그를, 우리를, 나를 만납니다.

저는 계속 슬프네요.
그래서 다시 그를 만나러 갈려구요.
슬퍼하지 않으면, 슬퍼서 힘드네요.
혼자서 슬퍼하기도 이제 조금은 힘듭니다.
그러니까
그 곳에서 나와 우리가, 그가
당신을 기다려요.
그를 만나러 가요.
기다리는 곳이 바뀌었지만
만나는 사람은 똑같아요.
기다릴게요.
괜찮아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만나러 가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여신유
16/05/24 18:26
수정 아이콘
굉장한 타이밍의 글이네요.

오늘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퇴근을 하면 장례식장으로 향할 거에요.
가서 열심히 슬퍼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Otherwise
16/05/24 19:12
수정 아이콘
왕천군님이 여성 관련 글에서 이런 온건한 글을 쓰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글이네요. 추천드립니다.
연환전신각
16/05/24 20:05
수정 아이콘
지난번에 여성관련 이슈로 한 번 사단이 났었기 때문에......
자숙 타임
양정원
16/05/24 22:10
수정 아이콘
아마 관련 옹호글 쓰셨으면 아직 자욱이 남아있는지라 글 내용과 상관없이 융단폭격 맞았을겁니다
저였으면 댓글 안 달고 패스했겠지만 곱게 봤으리라는 자신은 없네요 사람이다보니.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공지]202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게시판을 오픈합니다 → 오픈완료 [53] jjohny=쿠마 24/03/09 26679 6
공지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249453 0
공지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25621 8
공지 [필독] 성인 정보를 포함하는 글에 대한 공지입니다 [51] OrBef 16/05/03 448569 28
공지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18758 3
101305 스포 無) 테츠로! 너는 지금도 우주를 떠돌고 있니? 가위바위보329 24/04/20 329 0
101304 서울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탄 [30] kogang20012942 24/04/19 2942 11
101303 서울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탄 [9] kogang20013185 24/04/19 3185 5
101302 이스라엘이 이란을 또다시 공격했습니다. [142] Garnett2113906 24/04/19 13906 5
101301 웹소설 추천 - 이세계 TRPG 마스터 [21] 파고들어라4526 24/04/19 4526 2
101300 문제의 성인 페스티벌에 관하여 [157] 烏鳳11348 24/04/18 11348 61
101299 쿠팡 게섯거라! 네이버 당일배송이 온다 [41] 무딜링호흡머신7412 24/04/18 7412 5
101298 MSI AMD 600 시리즈 메인보드 차세대 CPU 지원 준비 완료 [2] SAS Tony Parker 2915 24/04/18 2915 0
101297 [팁] 피지알에 webp 움짤 파일을 올려보자 [10] VictoryFood2881 24/04/18 2881 10
101296 뉴욕타임스 3.11.일자 기사 번역(보험사로 흘러가는 운전기록) [9] 오후2시4915 24/04/17 4915 5
101295 추천게시판 운영위원 신규모집(~4/30) [3] jjohny=쿠마6248 24/04/17 6248 5
101290 기형적인 아파트 청약제도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부분 [80] VictoryFood10805 24/04/16 10805 0
101289 전마협 주관 대회 참석 후기 [19] pecotek5534 24/04/17 5534 4
101288 [역사] 기술 발전이 능사는 아니더라 / 질레트의 역사 [31] Fig.15526 24/04/17 5526 12
101287 7800X3D 46.5 딜 떴습니다 토스페이 [37] SAS Tony Parker 5549 24/04/16 5549 1
101285 마룬 5(Maroon 5) - Sunday Morning 불러보았습니다! [6] Neuromancer2927 24/04/16 2927 1
101284 남들 다가는 일본, 남들 안가는 목적으로 가다. (츠이키 기지 방문)(스압) [46] 한국화약주식회사7570 24/04/16 7570 46
101281 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31] Kaestro6948 24/04/15 6948 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