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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31 11:00:02
Name 글곰
Subject 왜 역사를 좋아하는가?
질문게시판에 댓글 하나 달았다가 보충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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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 특히 국사는 재미있었습니다.
마치 삼국지연의 같았거든요. 적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멋진 조상님들. 을지문덕 강감찬 서희 이순신 김좌진 기타 등등.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니 국사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삼국시대 고구려 정도는 조금 볼만했죠. 대륙의 웅혼한 기상 오오오. 달려라 만주벌판 오오오. 하지만 발해 멸망 이후로 코딱지만 한 한반도에서 서로 토닥거리기만 하는 게 아닙니까. 고려가 대몽항쟁을 통해 몽고를 이겨냈다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그냥 전 국토가 완전히 박살나질 않나, 조선까지 넘어오면 왜란이다 호란이다 해서 대 놓고 신나게 털리고 있으니까요. 그때쯤 대쥬신제국사라거나 퇴마록 같은 괴이한 책들도 우연찮게 접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빠가 되지 않은 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시절이었잖습니까. 사무라이가 백제의 싸울아비에서 비롯되었다는 출처 모를 헛소리가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무렵이었으니까요.

대략 이십대 초반쯤이 되어서야 제 보잘것없는 역사관도 나름 정립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마스터베이션의 도구가 아니라는 거죠. 뭐 정말 뻔하디 뻔한 이야기이긴 한데, 이런 명백한 사실을 깨닫는 데만도 물경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부끄럽네요.



저는 역사라는 게 인간의 의지에 의한 멋들어진 결과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더군요.

역사라는 게, 짜잔 하고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남과 동시에 자 이제 모두 앞으로 나아가자! 하면서 쑥쑥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흙탕에 뒹구는 것처럼 오만가지 고난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들 방향조차 모르고 닥치는 대로 이리저리 치달으면서, 그래도 사람들의 막연한 의지가 하나 둘 모여서 어느 순간엔가 정신을 차려 보면 예전보다 아주 조금쯤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있는 그런 상황. 그런 유구한 삽질의 무한한 반복을 통한 매우 점전적인 개선을 한데 모아 묶은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정도전의 마지막 화에서 정도전이 정몽주더러 그러죠.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네.” 그렇습니다. 이게 역사의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결과물은 깔끔하지 않고 대체로 엉망진창이죠.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의 업적은 참 많지만, 실수와 실패 또한 징그럽게 많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걸요. 그리고 어쨌거나 그는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역사를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반 발짝쯤 움직였습니다.

세계사에서 감히 혁명이라는 말을 붙이는 산업혁명, 프랑스대혁명도 그 내면을 보면 오만가지 실수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납득할 수 없는 행동과 이게 뭐야 싶은 것들이 한데 우겨넣어져 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새로이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기들끼리 열심히 싸우면서 반대파의 목을 기요틴으로 날려버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사이좋게 다 죽어버리고 결국 나폴레옹을 황제로 하는 왕정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대체 이게 뭔가 싶죠. 현대의 관점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비윤리적인 내용도 엄청 많습니다. 산업혁명 시대에 자본가들은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맹이들을 고용해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일을 시켰습니다. 자칫 실수하면 불구가 되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걸 볼작시면 세상이 정말 진보한 게 맞나 싶기도 하다니까요. 가까운 예로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유산인 4.19혁명을 볼까요? 거칠게 말해 4.19의 결과물은 박정희였습니다. 이승만 거르고 박정희. 변비 때문에 변비약을 먹었더니 이젠 폭풍설사가 나오는 격이죠. 이게 뭡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서 역사는 아주아주 조금씩, 그러나 꾸준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그게 역사의 진짜배기 맛입니다. 이런 진흙구덩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거부하는 사람들은 외도로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환빠들이 있는 겁니다. 환빠의 핵심이 바로 "우리가 이렇게 구질구질할 리가 없어! 우리는 졸라 멋졌을 거야!"거든요.

하지만 역사는 사람들의 삶을 한데 모은 것이고, 삶이란 원래 구질구질한 겁니다. 우리의 조상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멋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대를 살아갔고, 최선을 다했고, 수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이루어냈을 뿐입니다. 심지어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조차 그 성취만큼이나 많은 실수와 실패를 쌓아올렸습니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 한둘이 나와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놓기조차 하죠. 히틀러처럼요.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발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를 좋아합니다. 전 낙관론자니까요.



ps) 뜬금없지만 추천음악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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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31 11:07
수정 아이콘
요즘 한국사시험 때문에 매일마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지금은 근현대사를 강의듣고 있습니다.

근현대사는 하는 일마다 족족 실패했다는 이야기밖에 없으니 가슴이 아파왔는데, 이 글 보고 위안을 얻네요.
가만히 손을 잡으
14/07/31 11:08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치고 받고 싸우며 앞뒤로 흔들려도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는게 우리의 역사고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선마우스
14/07/31 13:23
수정 아이콘
역사가 발전하는 것은 맞나요? 예전 노예제도 이런 것에 비해 나아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가 오래 되면서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이를 뒤집기도 힘들어 보이죠. 예전보다 먹고 살만해졌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안되는 나라들도 많고, 그건 기술이 발달한거지 역사가 발전했다기에는 좀 다른 이야기 같아서요.
14/07/31 14:02
수정 아이콘
역사의 발전이란 대체로 기술, 문화, 제도, 정치 등 모든 분야를 포괄한 것입니다. 기술이 발달한 거지 역사가 발달한 건 아니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나 싶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아프리카의 빈곤층은 소위 현대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고 있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그런 절대적 빈곤층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평균적으로 보면 과거에 비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재화나 문화, 주거와 식생활 등은 분명 예전보다 나아졌습니다. 인권에 대한 관점이라든지 사회제도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일부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여성들이 인간으로 대우받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도 주어지는 의료 혜택은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평균수명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인간은, 역사는 분명 조금씩이나마 발전하고 있습니다. 진보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절름발이이리
14/08/01 10:54
수정 아이콘
그냥 잼있어서 좋아합니다.
꽃보다할배
14/08/01 11:13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의 경우는 이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내린다...그래서 나폴레옹이 그런 엄청난 지지를 받았죠. 특히 헬레나 섬에서 탈출하여 본토로 귀환은 황제의 귀환이 얼마나 극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렇다고 대영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지만요. 그 결과 대패하고 영원히 유배를 갔지만 프랑스 혁명을 아무도 실패라고 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수만년 지속되고 근대 민주주의가 생긴지 백년이 넘었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이 원래 질서가 없는 완전 평등은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좀더 합리적인 수직 구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나폴레옹이 무의미하지 않다라고 생각하거든요.
14/08/01 11:43
수정 아이콘
그냥 현재와 다른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간다는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4/08/01 13:21
수정 아이콘
신석기이후로 많은 발전이 있긴했죠
반만년전 국가들이 형성되고 현재까지 왕과 백성이 사장과 노동자라는 글자만 바뀌고 별 다를게 없듯 뭔가 겉만 진보되는 느낌이 많이 들긴 합니다
그리고 너무 느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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