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6/25 14:05:47
Name 켈로그김
Subject [일반] 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울산 제2 단조공장 앞에서 내려서
내 인생의 2배는 산 아저씨들 틈에 섞여 걷다보면 귀소본능처럼 내 자리 앞에 서게 된다.
(근데, 그 아저씨들이 지금 내 나이보다 몇 살 많네;;)
그리고 능숙하게 아반떼 엔진의 엉덩이를 뒤집어 까고 주사를 놓듯 밸브를 끼워넣는다.

이 짓을 10초에 한 번. 1시간에 360개의 엔진에 벨브를 꼽아 보내는게 내 일이다.


그러다 린번엔진 타임이 오면, 드릴로 너트를 박아넣는 일이 추가되는데,
보일듯 말듯한 린번엔진 표시를 알아채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주머니 가득 너트를 넣고 뛰어가서 너트를 박아넣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꼭 허벅지엔 멍이 들어있다. 꼭 새총으로 쏘지 않아도 너트는 흉기가 맞는거 같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일하다 보면, 1시간에 5~10분정도 컨베이어가 빌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잽싸게 휴게실로 가서 담배를 빨고, 똥오줌도 가리면 된다.

이 짓을 12시간 하는게 내 일이다.


일이 마치면, 십짱형이랑 공장 앞 식당. 혹은 아저씨들이 끼면 좀 더 으슥한 술집으로 가서 술을 한 잔 한다.
안주는 정주영.
그는 죽었지만 안주가 되어, 노래가 되어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계시다.
얼큰하게 취하면 노래를 한다.
"정주영 잡으러 재단에 갈 때엔, 한 손엔 식칼들고 한 손엔 도끼 (헤이!)"


구내식당에 일하는 누나가 참 고왔다.
밥먹으러 가서는 일하는 모습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수줍게 짜증나는 표정을 짓고는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곤 했는데,
가끔은 내가 꺼졌는가 확인하러 고개를 빼꼼 내밀다가 다시 눈이 딱 마주쳤던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보직이 변경됐는지 볼 수가 없었다.




"누나 좀 쳐다볼께"
"시선 가드"
"뚫어라 눈알광선"


-----------------------------


대한민국 2차 산업의 대명사인 현대자동차.
그 중에서도 핵심중의 핵심인 엔진조립부에서 일하던 고오-급 인력이었던 나는 지금 닭 내장을 빼고 있다.
영양사 누나를 쳐다본 죄로 부당하게 해고되고, 어쩔 수 없이 진로를 급 변경하는 바람에 찾아온 빈곤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하락은 일의 빈도의 차이로 나타난다.
엔진은 10초에 하나씩 왔는데, 닭은 1초에 한마리씩 온다.
계속 온다.. 끝없이 온다..
컨베이어는 무자비하게 돌아가고, 라인에 선 자들의 자구책으로 각자 돌아가며 2시간에 5분 쉬는게 최선이 된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어쨌든 식품을 다루기 때문에 내부를 청결히 하느라 따뜻한 수돗물이 나와서
똥까지는 무리지만 오줌은 옷에다 싸고 샤워기를 바지춤에 넣어 씻어내릴 수 있다는거다.

어쨌든, 1초에 한마리. 
1시간에 3600마리의 닭의 똥꼬를 벌려서 내장을 뽑아내는게 내 일이다.

그리고 그 짓을 12시간 하는게 내 일이다.


매 주, 혹은 격주로 수요일 퇴근시간에는 근무자에게 닭을 싸게 내 놓는다.
팔 수 없는 닭들을 싸게 파는 것인데,

똥꼬가 지나치게 넓게 찢어져 배꼽까지 이어졌거나, 
밟혀서 구두밑창 무늬가 찍혀있거나, 
날개나 다리가 하나 없거나,
이빨자국이 있거나(?),
그런 것들이다.
나는 내가 밟았던 녀석이 반가워서 한마리 사서 자취방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해 먹었다.
그리고 그 후로 치킨은 무조건 시켜서 먹는다. Don't try this at home..


돈은 자동차공장에 비해 더 많이 줬기에 계속 일을 하고 싶었지만, 검지와 중지가 점점 아파왔다.  
결국 양 손의 손가락들이 모두 내 고추만해졌을 때.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손을 꺼내 들고 다니는 것 만으로도 공연음란맨이 된다는게 두려웠다.
친구는 그게 지금과 다를게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진실된 친구를 한 명 발견했다. 개이득.

------------------------------------------------------------

그 친구와 함께 약국을 차렸다.
그리고 그 친구는 곧 로스쿨에 갔다.

나는 자식을 유학보낸 기러기 아빠의 심정으로 성실하게 일을 했고,
어느덧 시간당 5명에서 시간당 30명으로 응대해야 할 환자의 수가 늘어났다.

가끔은 사람이 엔진으로 혹은 닭으로 보일 때가 있고,
약이 너트로, 밸브로, 혹은 모래주머니로 취급될 때가 있다.
그래도, 그 숫자의 차이만큼은 성의를 곱해서 보이고 있(을것이)다. 아마도..

홍길동 환자..
당신은 알까?
당신이 내장이 제거된 닭고기보다 120배. 밸브가 조립된 엔진보다 12배나 가치있는 고객임을 말야..
(대충 때려잡아서 말이지;;)

나도 잊지 말자.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를.
내가 지금 하는 일의 의미를.
그리고..
밥누나의 눈빛을..

----------------------------------------------------------


...그냥.. 
직원이 신혼여행 가고 혼자서 일하면서 허덕허덕대다가..
'이렇게 바쁘고 힘든건 참 오랜만이군 크큭..'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보니 옛날에 비슷한 느낌으로 일했던 생각도 나고 해서
뻘소리를 투척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해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Jannaphile
16/06/25 14:24
수정 아이콘
[한가지 다행인 것은, 어쨌든 식품을 다루기 때문에 내부를 청결히 하느라 따뜻한 수돗물이 나와서
똥까지는 무리지만 오줌은 옷에다 싸고 샤워기를 바지춤에 넣어 씻어내릴 수 있다는거다.]


... 네? 뭐라고요? 명불허전...
고랭지캬라멜
16/06/25 22:12
수정 아이콘
pgr 의 정체성!
Jannaphile
16/06/26 02:45
수정 아이콘
큰 것에 이어 작은 것마저 해당되는 겁니까? OTL
켈로그김
16/06/27 10:04
수정 아이콘
실제로 저도 몇 번 그랬고,
그 내장제거반에서 일하던 중국 유학생들도 그런 식으로 용변을 처리하곤 합니다.
작업복이 고무재질이고 + 화장실이 졸라 멀고 + 소변이 아니라도 닭 내장제거 과정에서 튄 오물때문에 수시로 옷을 입고 샤워를 해야 함.

그러니까.. 샤워하면서 쉬하는거랑 사실 비슷해요.
쉬하고 나서 씻는다기 보다는;;
성야무인
16/06/25 14:25
수정 아이콘
대학원 다닐때 10년후에 그냥 저냥 학위 끝내고 교수 아니면 연구소에서 두뇌노동자가 되있겠지 이랬는데 현재는 서류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R&D를 하는게 아니라 과제에 낼 서류만 쓰고 있고 진로는 맞는것 같은데 원하는 일을 하는게 아니라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사전작업과 사전작업이 끝난뒤 추후 작업을 위한 서류만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이더군요.
켈로그김
16/06/27 10:03
수정 아이콘
어디서나 이상과 현실은 괴리되어 있더라고요..;
미카엘
16/06/25 14:30
수정 아이콘
pgr의 마스코트께서 쓰신 글답습니다. 흐흐. 재밌게 읽고 갑니다~
켈로그김
16/06/27 10:0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흐흐;
tannenbaum
16/06/25 14:38
수정 아이콘
거 참..... 아니 총각이 이쁜 누나 쳐다 본 게 무슨 죄라고 해고까지 하는거여. 매정하구로....

저도 대학시절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굶어 죽는 상황이라 이것저것 해봤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알바는 공동묘지 이장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공동묘지 터를 정리하고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데 사전작업으로 공동묘지의 수많은 무덤들 중 무연고 묘들을 파내서 유골을 수습해서 화장 후 안치하는 일이었지요. 대부분 백골형태였지만 간혹가다 매장한지 얼마 안된 무덤 같은 경우는 백화가 진행되지 않은, 쉽게 말해 아직 썩어가는 시체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럴땐 나무칼로 살점은 발라내고 뼈만 수습하지요.

높은 일당에 혹해서 우르르 같이 갔던 덩치 산만한 친구들은 하루는 커녕 반나절만에 다 도망갔고 저만 공기 끝까지 남아서 마무리 했습니다. 왜냐면.... 당시 노가다 잡부 일당 3만원 시절이었는데 6만 8천원 줬거등요. 사람 백골이나 시체보다 현금 6만원의 빠와가 훠어어얼씬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숙식을 했는데 일 끝나고 밤마다 고기에 소주 사줬습니다. 고기 마이쪙. 소주는 더 마이쪙 마이쪙~
켈로그김
16/06/27 10:08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맛있는 고기랑 소주 저도 좀;;
웨인루구니
16/06/25 15:50
수정 아이콘
저는 상황버섯 농장 알바를 했었던게 제일 특이했네요..
곰팡이란 곰팡이는 다 본 것 같습니다.
켈로그김
16/06/27 10:09
수정 아이콘
농장알바도 되게 빡셨을텐데.. 고생하셨습니다 흐흐;;
16/06/25 17:24
수정 아이콘
시선 가드!! 크크크크크 ㅠㅠ 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켈로그김
16/06/27 10:15
수정 아이콘
눈에 힘주면 다 보여! 크크크;;
전광렬
16/06/25 17:43
수정 아이콘
육체적 스트레스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선택하라면 육체를 선택하겠어요.
시간당 1명온다면.... 머리가 슝슝 빠질것 같네요. 크크크
고도의 자랑글로 읽히는 건 저의 부족한 탓이겠죠?
wish buRn
16/06/26 06:50
수정 아이콘
티윈 라니스터셨네요 흐흐
켈로그김
16/06/27 10:16
수정 아이콘
관장약과 밴드 요오드고객 포함 30명입니다 흐흐흐;;
그리고.. 소아과....
정말 죽을거 같아요 ㅠㅠ
실론티매니아
16/06/25 21:41
수정 아이콘
큰 것 뿐만 아니라 작은 것도 역시 굉장하시군요
오늘도 인생의 스승님께 한 수 배웁니다
켈로그김
16/06/27 10:17
수정 아이콘
사람들이 나쁜건 정말 잘 배우는거 같아요 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283 [일반] 이시국에 써보는 약국 일상 [42] 켈로그김7745 19/08/21 7745 15
78063 [일반] 이제는 일하기 싫습니다. [34] 켈로그김9673 18/08/30 9673 12
77210 [일반] 나도 써보는 저탄고지 4주차 수기 [32] ShuRA16201 18/06/07 16201 3
76848 [일반] 육아 커뮤니케이션. [29] 켈로그김9053 18/05/02 9053 30
76702 [일반] 아내가 내게 해준 말. [35] 켈로그김11200 18/04/19 11200 43
75441 [일반] 18년 2번째주 잘 보내셨나요? [11] 함락신5491 18/01/15 5491 4
74529 [일반] 잠못드는 새벽의 뻘소리; [16] 켈로그김5895 17/11/10 5895 8
73737 [일반] 꼬꼬마 사업가는 왱알앵알 웁니다. [37] 켈로그김7912 17/09/13 7912 11
71900 [일반] 오늘 들었던 노래 몇 곡. [10] 켈로그김5030 17/05/18 5030 1
69469 [일반] 노래로 얻는 교훈. 그리고 근황;; [8] 켈로그김5251 16/12/17 5251 2
68658 [일반] [공지] 함께하는 한숲 아동 치과진료 기부행사 후기. [15] 켈로그김3948 16/11/15 3948 29
68189 [일반] [스포X] 지극히 주관적인 <혼숨> 감상평. [3] 화이트데이4007 16/10/27 4007 0
67850 [일반] 한숲 결연 학생들과의 이벤트 후기 [32] OrBef5136 16/10/06 5136 47
67844 [일반] 아주 국회의원 나셨네 나셨어.. [30] 켈로그김11499 16/10/06 11499 72
67785 [일반] 운영진/운영위원 변동 사항 공지합니다 [16] OrBef4334 16/10/02 4334 11
67365 [일반] 손 한번 잡아보자. [50] 켈로그김8153 16/09/01 8153 5
66971 [일반] 내 생에 최고의 한 곡 [9] 켈로그김4226 16/08/14 4226 1
65955 [일반] 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19] 켈로그김6544 16/06/25 6544 21
64393 [일반] 약국 3대째. [97] 켈로그김7854 16/04/01 7854 12
64310 [일반] 7레벨 고문 제도를 시작하며 몇 분을 모십니다. [35] OrBef5279 16/03/28 5279 17
63276 [일반] 등가교환의 법칙 [13] 켈로그김7240 16/01/25 7240 7
63041 [일반] 규칙과 시스템, PGR의 나아갈 방향. [59] Jace Beleren5641 16/01/11 5641 9
62701 [일반] 냉장고를 부탁행.. [43] 켈로그김12052 15/12/22 12052 2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