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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흥의 열두 딸들 이야기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시흥군이 없어지는 1989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같이 태어난 세 도시가 군포시, 시흥시, 의왕시다. 의왕시는 1914년의 시흥군에는 포함되지 않으므로 ‘열두 도시가 한때는 한 고을이었다’에 맞지 않아 제외하면, 시흥시와 군포시가 남는다. 그 중에서도 먼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곳은 탄생 당시 더 큰 도시인 군포시다.
군포시의 이름이 유래한 군포역.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군포시 역명판
군포역, 군포시를 만들다한강의 제 1지류 안양천은 의왕시에서 나와 군포시, 안양시, 광명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를 지나간다. 지금은 안양천이란 이름으로 강 전체를 부르지만, 옛날에는 같은 강이라도 지나는 구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많았다. 안양천 상류에서 지금의 안양시 시내 구간을 옛날에는 군포천이라고 했다. 이 이름은 1699년 과천현신수읍지에 기록된 오래된 이름이다.
그러나 군포천이 지나가서 군포시가 된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군포역이 있어서 군포시가 된 것이다.
군포천 근방에 군포장이라는 시장이 조선 시대부터 있었는데, 도양리, 지금의 안양시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근처였다. 이 군포장은 수원 북문밖장과 연계되어 있어서, 19세기 후반에는 작은 장으로 언급되지만 인근 안양장에 비해서는 3배의 장세를 내고 있어 안양장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당시 과천군 남면 당리, 지금의 군포시에 역을 짓고 군포장으로 들어가는 역이라 해 이름을 군포장역으로 지었다. 이 군포장역이 지금의 군포역이다.
이 군포장역이 철도에 힘입어 인근 지역의 중심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에 이 지역이 군포시가 된 것이다. 만약 이때 역 이름을 지명에서 따서 당리역이라고 지었으면 시 이름도 당시가 되지 않았을까? 사실 원래는 군포장을 바로 지나서 수원과 의왕을 가르는 지지대고개를 지나도록 노선을 정했는데, 지지대고개가 너무 험했기 때문에 돌아가서 지금의 군포역과 의왕역을 지나도록 우회한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 군포장을 바로 지나도록 노선이 정해졌다면 나중에 안양시가 될 서이면에만 역이 둘 있었을 테니, 안양시와 별개의 군포시라는 도시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도, 군포의 명과 암
철도역 이름에서 시 이름이 나왔을 만큼, 경부선 개통은 군포시라는 한 도시가 싹트는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경부선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니만큼, 일제는 부당하리만치 헐값에 철도 터를 사들였고 보상금조차도 일본 제일은행권을 보급하기 위해 수수료로 20%를 공제했다. 더욱이 철도 연선의 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자로 동원해, 이에 반발한 저항운동이 빗발쳤고 이를 단속하기 위해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국 전역을 군율로 다스리게 했다. 군포에서도 군포역장이 이를 핑계로 부역을 강요하고 금전을 침탈한다는 진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근대 문명의 이기인 철도는 확실히 주변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군포장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면사무소·순사주재소·우편소 등 주요 시설도 자리를 잡았다. 1913년에는 군포장역의 이용객수가 연간 2만 9,727명, 발착화물은 1,997t으로 이용객수 연간 2만 7,166명, 발착화물 1,367t이었던 안양역보다 더 컸다. 이는 지금의 의왕역인 부곡간이정차장이 1944년 세워지기 전까지는 의왕과 반월 주민들도 이 역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안양 지역이 군포 지역보다 더 먼저 산업화하면서 군포와 안양의 세는 뒤집어지고 만다.
옛 군포의 명물, 수박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Watermelon in a small-scale organic farm in Tainan City, Taiwan
군포 수박어쨌거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안양천이 범람해, 본디 군포천 곧 안양천 근방에 있던 군포장도 12월 23일자로 군포장역 옆으로 옮겨오면서 군포장역은 이름과 실제를 모두 다 갖추게 된다. 일제강점기 후반 군포의 특산물은 수박이었고, 1930년대 말에는 군포 수박이 만주의 봉천까지 알려질 정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군포장 수박은 다른 인근 지역의 수박과 구분하기 위해 상표까지 붙여서 판매되었다.
원래 군포 지역의 특산물을 꼽자면 담배였다. 대한제국 말기의 군포시, 당시 과천군 남면은 논과 밭의 너비가 비슷했고, 밭에서는 계절마다 서로 다른 작물을 심었는데 여름에는 5%의 면적에 담배를 심었다. 과천군은 당시 전국에서 손꼽히는 연초 주 생산지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담배를 많이 키우는 곳이 바로 이 남면이었다. 특히 남면 초막동(지금의 산본동 일부)에서는 판매용 담배를 생산해 다른 동네에까지 내다 팔고 있었다.
군포에 수박이 도입되는 것은 1930년으로, 1920년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수박 재배가 상업화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군포의 토질이 수박 재배에 적당했고 맛도 다른 수박에 비해 달았다. 군포장역 덕분에 수박을 전국으로 운송하기에도 좋았다. 1935년 수박 생산액은 총 8만 700여 원에 달했다. 시흥군청에서도 1939년 군포서과출하조합을 설립해 품종개량, 비료제작 등 수박 재배를 후원할 뿐만 아니라 공동검사와 공동판매 제도를 이용하기도 했다.
안양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러나 본디 안양장보다 큰 군포장은 1928년에는 시흥군의 네 시장, 영등포장, 안양장, 군포장, 삼거리장 중 연간 거래액 3위에 불과했고, 1950년에는 삼거리장은 물론 새로 생긴 안산장에도 밀려 꼴찌로 전락하고 만다. 군포장의 세력 약화 때문인지, 경부선 복선화가 완료된 1938년에 군포장역의 이름은 군포역으로 바뀐다. 더구나 의왕면과 반월면의 화물은 군포역을 거치지 않고 수원이나 서울로 직송되고 있었고, 1944년 3월 1일에는 부곡간이정차장(지금의 의왕역)이 생기면서 기존에 군포역을 이용하던 의왕면과 반월면 사람들이 부곡간이정차장으로 빠지게 되었다. 철도로 인해 군포역 주변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더 넓은 시야로 보면 안양과 수원 사이에서 발전의 기회를 빼앗기고 있었다.
이후 군포의 발전도 자체적인 동력보다는 서울과 안양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군포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1973년 안양시의 8차 토지정리구획사업으로, 이 사업은 대부분의 면적이 현재의 군포시에 포함되느니만큼 안양보다도 군포 지역의 발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군포시가 안양시 도시계획에서 빠져나와 독자적인 도시계획을 행하는 때가 오려면 군포시가 독립하는 1989년을 넘어 1997년까지 가야 한다.
군포의 공업화1959년 - 1989년 군포 지역의 공장과 종업원 수
군포시가 근현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은 1970년대의 산업화를 통해서였다. 대한민국 수도권의 공업화는 가장 먼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축선에서 조금씩 확장되면서 진행되었는데, 이 선에서 조금 더 가까운 안양이 더 먼저 산업화되었고 군포는 그보다 조금 늦게서야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61년만 해도 시흥군 남면의 인구는 5,855명에 불과했고 전체 호수 중 68.8%가 농가였다. 1969년에는 44.4%로 감소해, 비농가수가 농가수를 앞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금씩 공업화가 진행되고는 있었으나, 이웃 안양읍의 10.9%에 비하면 매우 높은 것이었다.
1969년 당시의 군포 지역의 공장은 총 15개로, 특정 분야에 전문화되지 않고 다양한 업종의 공장이 있었다. 이렇게 수도 적고 종업원 수도 적어서 공업화는 미약한 정도에 불과했다. 군포 지역이 본격적으로 공업화되는 것은 1970년대였다. 1975년에는 공장 수가 57개에 달해, 1969년과 비교하면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시흥군 지역 중 시로 승급한 안양시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것으로, 2위인 의왕면의 43개에 비해서도 매우 많은 것이었다. 1979년 말에는 117개로 더 급격히 증가한다. 1970년대에는 유한킴벌리, 유한양행, 현대양행, 농심(당시 롯데공업-1978년 농심으로 개명), 보령제약 등 유수의 대기업이 군포에 공장을 짓고 가동하기 시작해 공장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유한양행은 3,500평 규모의 대방동 영등포공장 제약시설을 군포로 이전하면서 무려 3만 9,000여 평의 터를 구입했는데, 이는 이 공장을 증축하려 했으나 수도권 규제 때문에 한계에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기존 서울의 비대해진 공업 시설이 확장에 한계를 맞이하고, 외부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에 포함되는 군포 지역도 같이 성장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군포에 들어선 농심의 새 공장 이름은 당시에도 현재에도 안양공장인데, 지금까지도 군포에 미치고 있는 안양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1973년 7월 1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하고, 1973년 11월 21일에는 군포를 간접적으로 지나는 경수산업도로(지금의 경수도로)가 개통했으며, 1974년 8월 15일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부선(또는 경수선)의 전철화로 군포역까지 전철이 들어오면서 군포의 공업화는 더 활발해졌다.
1977년 매일경제 기사 “부동산 패트롤” (11)에서는 당시 군포의 발전상을 그려내는데, 급격한 공업 발전 때문에 공장 종업원들이 과잉으로 몰려들어 사방 10자 방 1간이 작년(1976년)에는 10만원 미만이었으나 기사 당시에는 50만원으로 무려 5배 이상 뛰었는데도 물건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일부 근로자들은 안양과 수원 등지에서 통근했고, 그 때문에 군포역의 하루 이용객 수는 7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 60% 이상이 안양 등지에서 오는 승객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에는 오일쇼크의 충격으로 한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면서, 군포도 그 타격을 받아 공장 개수가 100개 초반 정도를 유지하면서 공업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3저 호황을 겪으면서 1989년에는 266개로 1984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종업원 수도 1984년보다 60% 이상 늘어났다. 공장 규모도 확대되어서 1984년 말에는 300명 이상이 근무하는 기업체가 16곳이나 있었고 이는 그 다음으로 많은 의왕읍의 6곳보다도 3배 가까운 수치다.
초기에는 당리, 당정리, 금정리 등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 당정동과 금정동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당정동의 가구와 인구수로 공업 위주로 개발된 나머지 가구와 인구수는 군포 지역에서 가장 적었다. 반면 금정동은 가구와 인구수가 가장 많았는데 이는 금정동에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이 섞여 있다는 증거다.
군포의 공업은 1979년에는 화학과 기계가 같이 주요 업종이었으나, 화학 업종은 공장 수는 늘어나면서도 종업원 수는 줄어들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기계 업종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1989년에는 기계 업종이 공장수의 58%, 종업원의 59%를 차지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군포가 발전하면서 환경 오염에 더 민감해지고, 오염을 더 많이 일으키는 화학 업종이 기계 업종에 점차 밀려났기 때문이다.
197-80년대 군포의 산업이 발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권의 과밀화가 더 심각해지면서 군포의 공장들도 군포를 나가 지방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1978년 현대양행은 군포공장의 설비를 창원공장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1982년 수도권 정비법을 시행하면서 수도권 공장들을 1983년까지 시외 지역으로 이전하게 하면서 이런 움직임은 더 활발해졌다.
인구의 변화와 도시화군포 지역의 인구 변화
군포 지역의 인구는 1970년에는 1만 명에 불과했으나, 1975년에는 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2만 명을 돌파했고, 1980년에 가면 농가 비율은 4% 이하에 불과해 이전의 농촌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급격하게 성장하던 군포의 인구는 1980년대 중반에는 정체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때에는 1979년 “공업배치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수도권 지역의 공업기능이 약화되고 마침 불어닥친 오일쇼크 등으로 인해 군포의 공업 발전이 주춤했기 때문이다. 군포시가 태어나는 1989년에는 10만 명을 돌파하는데 이는 산본신도시 계획 때문이다.
1960년 시흥군의 인구 분포
본디 1960년 당시 시흥군에서 군포 지역(남면)은 과천면과 함께 인구와 인구밀도 꼴찌를 자랑하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1979년 시흥군의 인구 분포
그러나 1970년대의 급격한 공업 발전으로 인해, 군포 지역은 1979년에 들어서면 시흥군에서 인구와 인구밀도 2위로 성장하게 된다. 1위는 곧 광명시로 독립할 소하읍이다.
군포시의 성장에는 철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1900년대 초반에 들어선 군포역과 군포의 관계는 이미 서술했다. 군포에 전철역이 하나 더 생기려면 무려 8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반월국가산업단지를 서울과 연결하기 위해 1985년 안산선을 설치하기로 하면서 안산선과 경부선이 합류할 지점을 찾았는데, 이미 안산선을 과천선과 이어서 4호선과 직결할 계획까지 고려해 군포 지역에 새 역을 세웠으니 바로 1988년 10월 25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금정리의 금정역이다. 금정역은 1호선과 4호선의 환승역으로서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지금도 군포시 내에서 가장 승객이 많을 뿐 아니라 구로역 이남 1호선에서 안양역과 함께 승객 수 1, 2위를 다투고 있다. 진짜 1위인 가산디지털단지역 승객이 대부분 7호선 역을 이용하기 때문이지만.
급격한 공업화 때문에 안양이나 군포나 물이 많이 필요했지만, 군포에 상수도가 들어오는 것은 무려 1982년 8월로 상당히 늦었다. 안양상공회의소가 1971년에 한강물 도수사업을 진행해 달라고 진정을 넣으면서 1974년 한강물이 청담취수장을 통해 안양과 수원 지역으로 통수되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상수도를 건립한 이후에도 물부족은 이어져서 안양8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도 지구 내에 상수도를 갖추었으나, 사업구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은 혜택을 보지 못했고 1984년 3월 22일에는 산본3-5리 주민 1,500명이 간이상수도의 물이 바닥나 식수도 공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 승격을 앞두고 1989년 11월 19일 제3단계광역상수도가 연결되면서 주민들이 공급받는 물도 하루 1만 2천톤에서 2만톤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수도권 광역상수도 4단계도 개통하면서 2007년에는 급수보급률 100%로 증가하였다.
군포시의 도시화는 이와 같은 공업과 교통 기반 시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왔지만, 1979년 남면에서 군포읍으로 승격하면서 체계적인 도시계획을 세우고 도시화를 이룩하게 된다. 그 첫 단계는 1980년 시행된 안양8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이 중 제2공구와 제3공구가 각각 군포읍 산본리와 금정리·당리를 담당했다. 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진행되었으며, 44.23%를 주택용지, 6.53%를 상업용지, 14.36%를 공업용지, 나머지 34.88%를 학교·공원·도로·공용청사·하천수로 등 공공용지로 배정했다. 비록 마무리가 될 때에는 이미 시로 독립한 군포시의 실정에 맞게 재조정이 필요했지만, 이후 시행되는 산본신도시계획의 전신으로 평가받는다. 1982년에는 안양8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빠진 금정리와 산본리 일부를 택지개발지로 지정해 총 2,400가구, 8,7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발했다.
산본신도시가 들어선 산본동.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Sanbon-dong in South Korea
산본신도시이 시흥의 열두 딸 연재에서는 딸 도시들이 독립한 후의 역사는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이 편에서는 군포시가 독립한 이후 완료된 산본신도시 이야기까지 다루겠다. 산본신도시 안에 새 시청을 지어 이주하는 등, 군포시가 안양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 산본신도시이기 때문이다.
산본신도시는 1980년대 후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성남 분당, 부천 중동, 고양 일산, 안양 평촌과 함께 정부에서 발표한 5개 신도시 건설의 일환으로, 말이 신도시지 실상은 이미 1980년대에 이미 많이 실시한 적이 있는 대규모 주거단지 건설에 불과했다. 이 5개 신도시 1,473만 9,000평에는 총 29만 4,000호(117만 6,000명 수용)를 짓기로 계획했는데, 산본신도시는 규모 425만 8,000㎡(128만 8,045평)에 4만 2,500호를 건설해 인구 17만 명을 수용하기로 했다.
1989년 8월 30일, 아직 시흥군 군포읍일 시절 착공한 산본신도시는 예상으로는 1992년 12월 31일에 완료하기로 했으나, 2년여를 더 써 1995년 1월 30일에 준공했다. 당초에는 주거단지 위주로 계획되었으나, 주택용지와 상업용지를 축소하는 대신 공공시설용지를 늘려 군포에 부족한 도시기반시설을 확충했다. 그럼에도 건설호수와 수용인구는 1% 남짓만 줄어들어, 수용인구는 거의 줄이지 않으면서 공공시설을 대폭 늘려 신도시의 자립을 도왔다.
본디 1981년 세워진 군포읍사무소(지금의 군포1동 행정복지센터)를 그대로 쓰고 있던 시청도 1992년 12월 2일에 산본신도시로 이주해 왔다. 시청 등 공영청사도 8곳에서 28곳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설 대부분이 산본신도시에 몰려 있어서 기존 도시권이나 나중에 군포시로 편입되는 대야동 일대는 군포시사를 쓴 2007년에도 여전히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고 한다. 군포시의 부족한 학교시설도 상당히 많이 늘어났는데, 1990년에는 초등학교 3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 1곳, 대학 1곳에 불과했으나 신도시계획대로 초등학교 13곳, 중학교 7곳, 고등학교 6곳을 설치했고 2008년에는 초등학교 22곳, 중학교 11곳, 고등학교 7곳, 대학교와 대학원 각 1곳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신도시 내의 문화시설은 미비한 편이었고 이를 해결하려면 1998년에 시민회관(현 군포문화예술회관)이 세워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1백 년 빈도의 홍수량을 대비하기 위한 홍수조절지도 설치했는데, 1977년 57년 만에 들이닥친 폭우로 10여 명의 목숨을 잃었고 안양과 합쳐 30여 곳 공장이 물난리를 겪은 뼈아픈 기억이 있는 군포시에는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신도시에 지은 주택은 총 4만 1,974호로, 이 중 공동주택이 98.6%로 절대 다수였다. 5개 신도시 중에서는 전용면적 18.2평 이하의 소형주택이 35.3%로 가장 많았다. 1995년 군포시의 주택이 총 5만 3,872호였는데 이 중 산본신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7.9%에 달했다. 산본신도시에 입주한 주민들은 43.6%가 서울에서 온 사람들로 서울의 인구를 분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신도시 주민 중 50%가 서울에 직장이 있어, 본디 소규모 공업도시인 군포시가 서울로 통근하는 주민들 위주의 베드타운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산본신도시 건설로 도로망도 효율적으로 구축되어, 서울로 통근하는 것뿐 아니라 군포시 내부 교통도 원활해졌다.
이후에도 군포지구, 부곡지구, 당동2지구 등에 택지개발이 이뤄져, 장차 군포역 남쪽에 당정역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신도시에는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산본신도시의 이미지에 타격을 준 시설로는 소각장이 있다. 산본신도시는 수리산을 끼고 있어 수려한 자연 경관이 장점이었는데, 당초 부곡동에 세우기로 한 소각장이 신도시 주민 때문에 필요한 시설이니 신도시에 지어야 한다는 논리로 옮겨오면서 ‘굴뚝 없는 도시’로 시민들을 끌어모은 산본신도시는 그 자랑거리가 조금이나마 퇴색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산본신도시를 떠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은 교육이었다. 2007년, 2008년 조사에서 교육은 경제력, 사업 또는 직장에 이어 산본을 떠나는 3위의 이유였다. 2위인 사업 또는 직장은 산본으로 오는 1위의 이유인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산본을 떠나는 제2의 이유가 교육인 것이다. 비록 산본신도시 건설로 이전에 군포에 부족한 교육시설을 대거 확충하긴 했으나, 여전히 주변 지역에 비해 군포의 교육 경쟁력은 부족한 편이다. 반면 소각장이 세워졌음에도 자연환경은 여전히 사람들을 산본으로 불러들이는 제2의 이유였다.
시흥의 열째 딸, 군포시산본신도시 계획이 나오기 전, 이미 공업도시로 발전한 군포읍의 인구는 1988년 기준 83,785명으로 시흥군 내에서 가장 많았다. 인근 의왕읍의 인구도 81,364명이었고, 군포·의왕과는 안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소래읍도 60,548명이었다. 결국 군포와 의왕을 시로 승격시키겠다고 정부에서 공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래-수암-군자와 군포-의왕으로 동서로 나뉜 시흥군을 어떻게 해체할 것이냐는 시흥군 내의 각 읍면들과 주변 지자체들, 그리고 경기도에 중앙 정부까지 나서서 여러 가지로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시흥시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결론은 군포읍과 의왕읍은 각각 시로 승격하고, 나머지 소래-수암-군자가 하나로 합쳐져서 시흥시로 승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1989년 1월 1일, 시흥의 마지막 잔해에서 열째 딸 군포시가 태어났다.
1989년, 시흥의 열한 딸과 군포시
군포시의 개발을 고려하면 이후의 행정구역 변화도 언급해야겠다. 안산시와 군포시와 의왕시 남쪽에 화성군 반월면이 있었다. 이 반월면은 조선시대에는 의왕시와 함께 저 멀리 광주군(!)에 속한 곳으로 구한말에는 인근 안산군에 편입했다가 부군면 통폐합 때 시흥에 편입된 나머지 안산군과는 달리 수원군에 편입됐고 수원군에서 수원시가 분리 승격하면서 화성군 반월면이 되었다. 그러나 수원, 화성과는 지지대고개로 분리가 되어 있어 생활권은 안양과 군포에 속해 있었고, 행정 서비스가 서로 다른 관할에 놓여 있어서 불편이 많았다.
군포·의왕을 함께 시흥시로 승격하고 반월면의 속달리·둔대리·대야미리·도마교리 4개 리를 편입하는 안이 있었으나 이 안은 핵심이 군포와 의왕의 통합이었기에 통합이 무산되면서 반월면 편입도 무산되었다. 군포시가 독자적으로 시로 승격할 때 이 반월면 4개 리는 다시 편입을 요구했으나 이때에는 군포시가 이 지역을 개발하고 기존 군포시와 통합하기를 어려워해 성사되지 않았다. 1992년에는 사정이 바뀌었는데, 산본신도시와 다른 개발사업으로 인해 녹지가 줄어들고 급수원이 필요해진 군포시에 반월면의 녹지와 반월저수지는 편입할 이유가 될 만했다.
군포시가 4개 리 편입에 긍정적으로 나서자 경기도가 나서서 다른 반월면 지역도 인근 안산시와 수원시에 편입하도록 결정했고, 마침내 1994년 12월 26일 반월면은 셋으로 나뉘어 안산, 군포,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이전에 일부 리가 의왕시에 편입된 것을 감안하면 반월면은 무려 넷으로 쪼개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반월면이 아무 이유 없이 한 행정구역이 된 것은 아니고, 모두 반월천 수계이기 때문에 반월면으로 묶인 것이다. 단지 독자적으로 도시 개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근 도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단일 생활권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덕분에 군포시는 구 군포시 영역 대부분을 지나는 안양천 수계와 부곡동 일부에 영향을 미치는 황구지천 수계 이외에 반월천 수계에도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반월면 속달리·둔대리·대야미리·도마교리는 군포시 속달동·둔대동·대야미동·도마교동으로 바뀌었고, 이 네 법정동을 통할하고자 행정동 대야동을 새로 만들었다. 대야동은 군포시 전체 면적의 42.2%를 차지하지만 도시개발은 미진하고, 이 지역의 주거환경 만족도는 다른 군포 주민들보다 낮은 편이다. 그래도 군포시의 반월면 편입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는데, 안산시 반월동 주민들이 2007년에 군포시 편입을 요구한 것에 비해 대야동 주민들은 대체로 군포시 편입에 만족하는 편이다.
이렇게 옛 시흥군 남면에서 출발한 군포시는 옛 화성군 반월면 일부까지 확장하면서 현재의 군포시가 되었다.
1994년, 화성군 반월면에서 대야동을 편입한 군포시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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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천에 대해 - 안양천생태이야기관
군포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명이 품은 경기도 군포
내년부터 日產(일산) 500萬食(만식) 조선일보 | 1976.09.08 기사(뉴스)
不動産(부동산)패트롤 (11) 電鐵(전철)주변 軍浦(군포) 매일경제 | 1977.06.02 기사(기획/연재)
금정역 – 나무위키
군포시사편찬위원회, 《군포시사 별책3·군포 역사신문》, 2010-07-15
市(시)승격 후보지를 가다 <3> 軍浦(군포)(始興郡(시흥군)) 매일경제 | 1988.11.28 기사(기획/연재)
산본신도시(山本新都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덕흥: 〈군포 구도심 문화복지행정타운 건립 장기화 불가피〉, 경기일보, 2022년 9월 1일, 2024년 4월 27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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