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민학생 시절,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출입문이 마주보고 있는 집에 중학생 형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이 굉장히 나이드신 일본분들이셨고, 매우 예의바르신 분이었던 기억에 비해
그 형은 잘 생긴 얼굴과 다르게 사고를 곧잘 치고 다닌 것 같았다.
어느날, 아마도 나는 방학이고 중학생은 보충수업 기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 형이 날 중학교에 데려간 일이 있었다.
어차피 몇년 뒤면 다닐 학교이기도 하고,
과자도 사준다고 하고 버스비 80원도 내준다고 해서 그냥 따라갔었나보다.
2.
O촌중학교앞에서 내리자마자, 북괴집부터 데려갔다.
북괴집은 작은 구멍가게였는데, 불을 켜 놓지 않아서 낮인데도 좀 어두컴컴했었고
그 형은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가방을 열고 베지밀을 몇 병 넣었다.
바짝 얼어서 가게방을 나와 라이터로 툭 따준 베지밀을 마셨고
이후로 몇년간 베지밀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3.
그리고 그 기억을 잊고 살았는데,
몇년이 지나 중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기억이 바로 날 수 밖에 없었다.
학교앞 정거장에 북괴집이 그대로 있었고,
3학년이 되기 전에 1,2학년들이 갈 수 있는 구멍가게는 거기가 유일했으니까.
4.
북괴집을 왜 북괴집이라고 부르냐.
중학생이 되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간판도 없고 전화번호부를 뒤져봐도 북괴집 북개집 다 없었는데 말이다.
의문은 좀 싱겁게 해결되었다.
면에 하나 있는 중학교여서, 이모들과 외삼촌들이 죄다 거기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 그 건물이 지어질때, 양철 슬레이트로 마감된 건물 이마부분에 "북괴는 노린다"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있었단다.
그게 비바람에 지워져서,
외삼촌이 다닐때에는 '북괴' 두 글자만 남아서 북괴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8살 차이 막내이모가 다닐 때부터는 아무 글자도 남아있지 않았음에도 계속 북괴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5.
뜬금없이 왜 이 북괴집이 다시 떠올랐냐면,
얼마전 유머사이트에서 본 '친구를 10년동안 업고 다닌 소년'이란 게시물 때문이다.
6.
사실
북괴집을 처음 갔을때,
가게 안쪽 방에 웅크리고 슈퍼마리오를 하고 있던 아이를 봤었다.
당시에 그 시골에서 보기 어려운 게임기보다 더 내 주의를 끌었던 건
그 아이의 툭 튀어나온 등이었고, 그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옆집 형의 손에 이끌려 북괴집을 나왔었다.
중학생이 되고 그 작은 아이가 나랑 같은 학년임을 알게 되었고,
곧 아침저녁으로 그 친구의 발이 되어주는 동일이란 친구도 알게 되었다.
7.
소아마비가 있던 정화는 햇볕을 잘 못봐서인지 앙상한 팔뚝은 늘 창백했고,
키는 작지만 장사체형에 동네에서 팔씨름을 제일 잘하던 동일이의 등에 업혀서 매일 등교를 했다.
유머싸이트에서 본 외국친구들과 같은 멋진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어린 내 눈엔 멋있게 보였다.
지금 돌아보면 자기 스스로 걷지도 못하는 그 친구의 멘탈도 대단했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고집도 셌고, 그냥 딱 그 나이의 친구였으니.
오히려 그 친구를 매일같이 업어서 다니던 동일이가 연구대상이었다.
사실 그 친구는 학내 폭력조직(?) 세븐의 멤버였고, 이름에서 보이듯이 싸움으로 순서를 매기면 열손가락안엔 들어가는 녀석이었다.
땅딸막한 키였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뭉쳐있는 느낌이었고, 혀가 짧아서 발음이 웃겨도 절대 앞에서 웃지 못할 정도로 인상도 험악했었지만,
정말 3년을 늘, 정화를 업고 등교를 하고 하교를 했었다.
졸업식때 무슨 작은 상을 받았었던 것 같긴한데, 친구를 업고 다니던 수고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본다.
혜택이라면 3년간 늘 맨 뒷자리가 고정이었다는 점 정도?
8.
고등학교를 타 지역으로 진학하게 되고, 집도 서울로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이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잊고 지냈었다.
정화는 아직 잘 살고 있을까.
사실 알아보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그냥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 북괴집 아주머니가 정말 온 힘을 다해서 키워주셨는데... 괜히 슬픈 이야기를 알게 될까 두렵다.
9.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그냥 월급루팡하며 본 유머글 하나에 삼십몇년전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고 있으니..
이정도 나이가 되면, 그 북괴집에 들러서 '옛날 베지밀 값이에요'라고 웃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는 중딩 아들들은 내 어린 시절 친구들같은 친구가 있을까?
남자아이들 흡연율이 80프로가 넘는다는 얘기를 하면 아빠의 학교 생활을 의심하려나.
건강한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학원가가 많은 동네로 이사가려고 안간힘을 쓰는게 맞는건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