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에 이승만은 개헌을 시도합니다. 사사오입 개헌에 가려지지만 이 역시 중요한 부분이죠. 그 때 이승만은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부결, 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합니다. 출범 때부터 양쪽은 내각 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를 가지고 싸웠고, 이승만이 이겼었죠.
5월 26일에는 야당 의원 50명이 연행되는 부산정치 파동이 일어났고, 국회 해산을 시도했던 이승만은 비난으로 그걸 보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6월 20일에 부산 국제 구락부에서 괴한이 들이닥치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런 가운데서 6월 30일이 밝았죠. 그 때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을 출근버스째로 견인하는 강수를 둡니다. 국회의사당은 군경에 의해 포위됐고, 투표는 기립 투표로 진행됐습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간선제보단 직선제가 좋았습니다. 6.25를 통해 그가 보인 집요한 반공은 국민들에게 너무나도 멋지게 들어맞아버렸거든요. 여러 정치인사들의 납북과 함께 한국 정치사에서 김일성을 까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전후인 54년 말, 그 유명한 반올림 -_-; 개헌이 공포됩니다. 당시 대통령은 중임까지만 가능했는데 이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제외하자는 것이었죠. 당시 의원은 203명, 이 중 2/3의 찬성표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자유당은 온갖 노력을 했지만 얻은 의석은 114석에 불과했죠. 여러 가지 수를 (채찍과 당근 -_-a) 써서 137명을 확보한 후 이 개헌안을 제출합니다만...
결과는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이었죠.
문제는 여기서 터집니다. 자유당에선 수학 교수까지 동원하면서 203명의 2/3는 135.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이니까 반올림하면 135명이라고 한 것이었죠. 아니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건 시작부터 말 해야겠죠?
이렇게 자유당의 폭주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때 자유당 내에서도 이에 반발한 세력이 탈당해서 민주당으로 가게 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입니다.
웃긴 건 한 표가 모자랐던 이유인데, 부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 문맹이라서 자유당 측에서 네모꼴이 있는 글자를 찍으라고 했답니다. 근데 可도 否도 다 네모가 있거든요. (...) 결국 둘 다 찍어서 무효표... 참 어이 없는 일입니다만 덕분에 자유당의 폭주를 제대로 보여주게 되었죠.
그렇게 56년 5월 15일, 3대 대통령 선거가 열립니다. 이승만이 천운을 타고 난 것인지, 이 천운을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강한 대항마였던 신익희가 유세중에 심장마비로 급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기 밑에 있다가 나온 조봉암이 덤비기 시작했죠.
1958년 1월, 이 일은 쉽게 끝납니다. 조봉암이 창당한 진보당을 북한과의 내통 혐의로 없애버렸거든요. 조봉암은 극우 인사들까지 나선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해 7월 31일 사형대에 오릅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56년에는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이 터지면서 김일성의 영구집권이 본격화됩니다.
그 다음에 이승만에 맞선 이는 조병옥, 하지만 그는 1960년 2월 15일에 병사합니다. 복부수술의 후유증 때문이라는데, 미국까지 갈 만큼 큰 병이기는 했지만 역시 뜻밖이었죠.
"이승만 박사와 맞서면 살아남지 못 한다."
남북 양쪽에서 몰린 박헌영, 좌우 양쪽에서 미움 받은 여운형, 처음에는 이승만 밑으로 만족하려 했던 김구, 임정 계열로 역시 이승만 밑에 있다가 맞서게 된 신익희, 아예 이승만 밑에서 농지개혁을 주도했다가 맞섰던 조봉암, 한민당으로 이승만과 많은 부분이 맞았지만 맞섰던 조병옥까지...
극좌부터 극우까지, 이승만과 처음부터 대립했든 협력했든, 그와 맞서는 자들의 운명은 다 이랬던 것이죠. 거기다 절친 김일성의 어시스트까지 합쳐지면서 이승만의 적수는 다 사라집니다. 그 다음 타자로 나온 윤보선과 장면이 있지만 아직이었고, 후에 대표적인 정치인이 되는 김영삼과 김대중은 어렸죠.
이렇게 4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단독 후보가 됩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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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했길래 그 정도였는가는 생략하겠지만, 이승만의 인기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최고긴 했습니다. 여운형과 김구가 사라진 이후부터는 그냥 독주였죠. 문제는 2인자였습니다. 김구나 이범석 같은 극우 인사들부터 해서 많은 인사들이 그걸 노렸지만, 최후의 승자는 이기붕이었습니다.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틈타 신성모를 몰아내고 2인자 자리를 굳혔고, 대통령비서실장부터 서울 시장까지 지내면서 경험도 쌓아 갔습니다. 맏이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바치기도 했죠. 웃긴 게 당시 법에는 장자를 양자로 보내는 건 금지돼 있었고,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후손이고 그가 효령대군의 후손이라서 뭔가 거시기하기도 했습니다. (...) 그 자신도 이강석을 아껴서 둘째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지만 이승만은 거부했죠.
"총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라 쏘라고 준 겁니다" - 4.19 후의 인터뷰에서
이래저래 자유당 내에서는 포스트 이승만이 되는 건 성공했지만, 밖에서는 달랐죠. 국민들은 자유당에 등을 돌리고 있었고, 신익희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조차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이승만은 이제껏 쌓아 올린 이미지라도 있었지 (그리고 이걸 계속 까먹으면서 살고 있었지 --a) 이기붕은 뉴비였거든요.
당시 1대 부통령은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의 이시영, 2대는 김성수였습니다. 김성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승만을 욕 하며 하야, 3대는 3.1 민족대표 출신이었던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됩니다. 이는 자유당으로 나왔던 이범석을 견제하려는 이승만의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이범석은 이승만 내에서 계속 있으려 했지만 소외됐고, 5.16 이후에는 박정희 시대까지 야당 인사가 됩니다.
뭐 어느 나라 부통령인들 안 그렇겠습니까만, 그 때까지 부통령 선거는 민심의 동향을 알 수 있을진 몰라도 정권을 잡는다 생각하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4대 부통령 선거는 조금 달랐죠.
1960년, 그 때 이승만은 86세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랐다는 얘기죠. 부통령의 가장 큰 역할은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이 되는 것, 어차피 대통령은 단독 출마인 이상 부통령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자유당은 밀리고 있었고 이기붕은 더 했습니다. 민주당에서 나선 이는 장면, 때는 3월 15일이었습니다. 이미 이기붕에 의해 암살당할 뻔했던 이였습니다.
이승만의 득표율은 89%,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습니다.
장면은 미국 역시 포스트 이승만으로 고려해 접촉하던 이였습니다.
이기붕의 득표율은 79.19%, 반면 대항마였던 장면의 득표율은 17.51%였죠.
"3월 15일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게 총 투표의 85%를 확보하도록 지시하는 비밀지령을 지난 주 한국 정부의 내무부가 전달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 투표소가 열리기 전에 40%에 해당하는 표를 미리 투표함에 집어넣고, 반공청년단과 경찰이 투표소 주위를 감시한다. 자유당에 표를 던지도록 지시받은 유권자들은 3인조 혹은 9인조로 모여서 투표하고 투표용지를 잘 보이도록 밖으로 접어서 누구에게 찍었는지를 보이도록 한다. - 야당의 선거참관인을 술에 취하게 만든다." - 워싱턴 포스트 60년 3월 9일자
"오직 기적만이 민주당에게 승리를 줄 수 있을 걸로 보인다." - 런던 타임즈 3월 14일자
"선거관리위원회의 직원들은 민주당 참관인들이 등록을 하러 갈 때마다 '신비롭게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 뉴욕 타임즈 3월 14일자
"선거가 공정하게 시행된다면 장면씨가 이길지도 모른다. - 유권자들은 이 용지에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에게 기표하는 방법을 신중히 배운다." - 타임 60년 3월 21일자
당선 기사
이를 위해 참 다양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미리 이기붕에 투표된 걸 준비해 두고, 3인, 7인조 투표로 서로 표를 확인하게 하는가 하면 민주당의 선거관리인은 쫓겨났고 거주민수보다 득표수가 더 많은 일도 벌어집니다. 장면의 유세일에는 학생들을 영화 관람이나 추가 시험 등의 이유로 휴일에도 강제로 등교시켰죠.
3번이나 해 먹었으니 이래도 큰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죠. 그 어느때보다 확실한 부정 선거였고,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야 언제 죽을지 모를 노인네지만 똑같은 꼴을 계속 보기엔 그는 너무 젊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정부의 대응이야 간단했죠. 이를 공산당 사주로 치부하고 경찰을 동원, 강제 해산시킵니다.
다음은 선거 당일, 마산이었습니다.
마산의 민주당 간부들은 선거 포기를 선언합니다. 그들은 시민들을 모아 부정선거를 규탄했는데, 이 때 경찰은 자신의 확성기를 뺏고 "자유"를 외친 고등학생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패 버립니다. 그야말로 사태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이죠.
3.15 의거 기념탑
이 모습을 본 마산 시민들은 대규모로 시위를 시작했고, 만여명이 넘는 사람들과 맞선 경찰들은 강경진압을 시작합니다. 이 때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아 정전이 되면서 혼란이 시작됩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 7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시민들이 부상당했죠. 시위대도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여 자유당 당사부터 파출소를 파괴합니다.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됐고 전국으로 번집니다. 그런 가운데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는 한 시신이 떠오릅니다.
전북 남원 출신의 둘째 아들 김주열, 그의 부모는 그에게 남원농고에 갈 것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그는 인문계를 가고 싶어했죠. 그는 남원농고를 그만두고 서울의 교통고등학교(철도고등학교)라는 타협을 하고 병 든 아버지를 설득해 서울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통고등학교의 합격자 명단에는 그가 없었죠. 실의에 빠진 그의 옆에는 서울대를 응시하러 온 형 광열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김주열에게 그는 마산상고를 응시해보라고 하죠.
김주열은 그를 따릅니다. 그가 먼저 원서를 들고 마산으로 갔고, 김주열도 남원터미널에서 마상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1960년 3월 10일, 오전 7시 30분이었습니다.
12일 마산입학시험을 치른 그는 형과 함께 외할머니 집에서 머물렀고, 선거로 인해 합격자 발표일이 연기되자 형과 함께 마산 시내를 둘러봅니다. 경찰의 최루탄 직사가 있었을 때였습니다.
겨우 빠져나온 그의 형 김광열은 급히 마산으로 온 어머니와 함께 한 달 가까이 동생을 찾아 헤맸지만, 다시 찾았을 때 그의 동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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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된 시신의 사진이 여러 장 있지만... 올리지는 않겠습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그의 시신이 떠오릅니다. 그 어린 피는 그 누구보다, 그 어떤 구호보다 더 강렬했습니다.
"1차 봉기와 달리 이 날의 봉기는 전 민중적인 참가로 일어났으며, 상황이 극도로 폭발적임" - 미국 정보관
이미 경찰이 발포라는 한계선을 넘었음에도 시민들은 수가 더 불어났고 2만을 헤아렸습니다. 이승만은 이를 공산당이나 카톨릭 세력의 사주로 늘 하던 것처럼 피하려 했지만, 이미 막을 수 없었습니다.
고려대 4.18 기념비
시위는 경상도에서 전국으로 퍼져갑니다. 18일, 고려대학교에서 3000여명의 시위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19일이 밝습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특정한 학교를 소개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많은 희생자가 있었고, 그럼에도 그들은 재선거를 요구하며 전진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이승만에게 남은 건 없었습니다. 어쨌든 명령이기도 하고 건국 전부터 그의 친위세력이었던 경찰들이야 잘 따라줬지만, 군은 그러지 않았죠.
"참군인"으로 칭송받는 이종찬, 그는 발췌개헌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지만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분노한 이승만은 그를 죽이려 했지만 유재흥 참모차장에게 막혔죠. 그가 참군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도 이렇게 군과 정치를 확실히 분리하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4.19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 됐던 송요찬 역시 군의 중립을 언론에 밝히면서 적극 진압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하며 유혈사태를 막고 치안 유지에만 신경 썼습니다.
........... 이런 케이스들 때문에 제가 창군 인사들을 친일파와 전잰범죄자로만 몰아붙이는 걸 비판하는 것입니다만, 선배들이 이렇게 모범을 보였음에도 그 후배들은 뭐 한 건지 모르겠네요.
"유엔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보호감금하며, 임시적 권력을 적절히 인준하는 등의 적극적 개입책이 필요하다." - 주한 미 대리 대사 1952년 6월 1일
"미국 정부가 한국의 선거 결과를 승인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차관이나 주요 원조 계획 등의 발표를 당분간 유보할 것을 요청" - 주한 미대사관 60년 3월 17일
"유엔이 한국의 통일 방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유로운 선거'는 남, 북한이 저마다 자유선거를 실시할 능력이 없으므로 불가능해 보인다." - 런던 타임스 3월 17일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음. 즉각적인 조치가 긴급히 요구됨 - 한국 정부가 미국의 권고에 부정적이고 비협조적이면 더욱 강력한 비상수단을 취해야 함" - 주한 미대사 4월 17일
이런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건국 전부터 이승만을 어떻게 견제하려 했습니다만, 이승만이 외교감각 등에서 자신들이랑 잘 맞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온갖 트러블이 일어났지만, 그 같은 강경 반공인사가 필요했죠. 하지만 시대는 이미 달라졌습니다. 이승만과의 트러블은 계속 벌어졌고, 그래도 민주화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체면이 서는데 이승만은 갈수록 정말 노망이 든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당시 미국은 일본의 부활과 한일간이 다시 손을 잡는 걸 바랬습니다만,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과는 별개로 그 어느 대통령보다 강경한 반일 인사였죠.
이런 가운데서도 소련의 흐루시쵸프의 등장, 제 3 세계의 등장이 계속됩니다. 이제 그런 강경 인사는 필요 없었습니다. 6.25 덕분에 반공은 당연시되기도 했으니 온건한 인물이 필요했죠. 어느 모로 보나 이승만을 더 이상 감싸 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죠.
주한미국대사는 4월 19일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하며 대사관으로 돌아와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어 미 정부에서도 한국에 항의했구요.
안은 물론 밖에서 이승만의 가장 큰 멘토였던 미국도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은 막다른 골목에 몰립니다.
21일, 국무위원이 모두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냅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했고 다음 날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25일, 어린 학생들이 아닌 사회의 엘리트층이자 그 학생들을 이끄는 대학 교수들이 나섭니다.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이것도 정말 결정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이 한 것은 불법시위 정도로 격하시킬 수 있었지만, 이들은 달랐죠. 그 무게감만큼이나 이들이 외친 것도 더 컸습니다. 학생들은 그래도 이승만 하야까지 외칠 순 없었지만, 이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 요구합니다.
교수단의 시위에 힘 입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더 커져갔으며, 심지어 국민학생들도 시위를 시작합니다.
"나는 해방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사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그는 이것을 끝으로 자유당 총재부터 대통령을 사임했고, 이틀 후 그의 후계자이자 이 일을 주도했던 이기붕이 자살합니다. 타살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한 달 뒤인 5월 29일, 그는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2공화국은 물론 박정희도 그걸 거부했고, 그는 다시 한국땅을 밟지 못 합니다.
후원금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실어증 등 여러 병이 걸리면서도 어떻게든 한국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그, 그래서 그 후원금과 성금을 쓰지 않고 아껴두었던 그, 하지만 그는 65년 7월 19일, 실의 속에서 세상을 뜹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최후였습니다. 죽은 후에야 한국에 돌아온 그는 박정희 대통령부터 각계각층의 설왕설래 끝에 국민장도, 국장도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죠.
자........... 4.19야 워낙에 잘 알려진 것이니 굳이 그 때의 민주열사 분들에 대한 설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승만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해보죠.
해방 후의 설문조사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여운형과 함께 해방 한국의 투톱이었습니다. 여운형이 쓰러진 후 그의 김구가 그의 맞수로 떠올랐지만 굳이 죽음이 아니더라도 인지도에서 꽤 차이났죠. 유일하게 남은 이승만의 맞수에다 남북협상 때문에 힘을 얻긴 했지만요.
확실히 그는 능력이 있기는 했어요. 업적을 찾자면 없는 것도 아니구요. 외교적인 면에서 미국을 확실히 끌어들인 건 그의 공로일 겁니다. 북한이 소련에 의해 양육되고는 있었지만 미국은 그 때 한국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적당히 반공 정부만 세워지면 되겠지 수준이었죠. 여기 방점을 찍어준 건 남침한 김일성이지만 미국이 한국을 좋든 싫든 싸고 돌게 된 건 이승만의 공이 크긴 합니다. 그 때 쏟아진 원조는 해방 후와 전후 부흥에 큰 힘을 줬구요.
내정 면에서 있어서 농지개혁의 힘이 컸습니다. 전후 한국 사회를 재편한게 되었죠. 반공을 외치면서도 이런 좌파적인 개혁을 했고, 공산당 인사였던 조봉암이 이걸 실행하는 걸 밀어줬죠. 이것이 지주층의 힘을 얻는 한민당을 견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정치적인 목적을 생각하더라도 훌륭한 개혁이었습니다.
문제는... 딱 여기까지라는 거죠. -_-;
어차피 반공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고, 내정 외에서도 미국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모습은 그저 노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 정말 노망이 맞았을 것 같아요. 어떤 연설 자리에서 "여기거 어디지?" 하는 카더라도 있습니다.
이미 민심은 자유당을 떠나 있었고, 조금씩 모습이 달라지면서 반이승만 버프를 얻어가던 민주당에게도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자유당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무능을 한참 넘어섰고, "운"인지 "운을 만든 것"인지 모를 대항마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자유당은 애초에 무너졌을 겁니다.
이기붕이 저지른 부정선거는 이런 자유당의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었죠. 이를 이승만이 몰랐다 하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최소한 묵인은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닦아놓은 길을 그대로 간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4.19 당시 재선거를 주장하던 학생과 시민부터, 안으로는 그의 명령에 충성해야 할 군과 정치보단 교육에 힘 써야 될 교수까지, 국외에서는 미국까지 등을 돌렸다는 것은 그의 1 공화국이 어땠는지 잘 말 해 줍니다. 정말 각계각층에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 말이죠.
이승만 국부론이라... 이해는 갑니다. 지금가지 늘 말 해 왔지만 저도 이런 것 때문에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글러먹었다" + "그러니까 북한이 낫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주장은 참 싫거든요. 그가 너무 과소평가 받는 감도 없진 않습니다. 일단 군사 정권 때부터 그를 깎아내렸고, 민주화 되면서 더더욱 깎이게 됐으니까요. 아무 잘 한 것도 없는 그가 옛날의 명성만으로 계속 그 자리를 해먹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걸 제 위치로 돌리려 하는 것까진 이해가 갑니다.
헌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거든요.
정말 상상 이상의 반공으로 해방 후부터 전쟁까지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그 때문에 죽었고, 빨갱이로 낙인 찍혔습니다. 진짜 북한 주도의 통일을 주장했다면 이해라도 가죠. 극우 인사들조차도 빨갱이로 몰았는데요. 정치 면에서는 진짜 노망을 보여줬고, 경제 면에서도 미국의 원조에 의지하는 이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그걸 외교적으로 잘 이용하기는 했죠. 그래서 미국에 말 한 게 이거였죠. "지금 당장 일본만큼 나라를 키워달라"
그의 손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의 시대에 발전은 물론 발전의 희망이 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박정희가 한 게 그리 다를 바 없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억하는 건 그만큼 희망이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었겠죠. 그것이 허상이든 아니든, 이승만의 시대에는 이런 것도 없었습니다. 전쟁을 핑계대면 안 되죠. 전쟁이 없었다면 그의 시대가 그만큼 끌 수 있었을지부터 의문이거든요.
그 양반들은 일제 시대를 평가하면서 탈민족으로 가면서 왜 해방 후에서는 태도를 바꾸고 이런 정통성을 강조하는 국가주의를 외치는 지 참 의문입니다. 어떻게 옹호하려 하든, 그는 "이 나라는 시작부터 글러먹었어"라고 할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아마 그런 미친 시대에 그라는 인물이 가장 적합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미쳤다는 게 변하는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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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흔히 미완의 혁명으로 불립니다. 얼마 가지도 못 하고 5.16이 터졌기에 그렇죠.
어찌 보면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도 참 닮았습니다. 시민의 힘에 의한 혁명, 내부의 혼란, 그리고 나폴레옹 독재의 순서였죠.
후의 6월 항쟁과 비교하면 머리는 더 아파집니다. 4.19는 딱히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됐습니다. 2공화국은 어느 정도 지지를 얻긴 했지만 그들이 주도했다기보다는 그들이 국민에 의해 끌어올려진 케이스였죠. 그리고 나라의 혼란 속에 국민들은 법을 어기고 쿠테타를 일으킨 군부의 손을 들어줍니다. 박정희가 쿠테타를 벌이긴 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건 민정이양 후 선거를 통해서라는 걸 잊으면 안 되겠죠. 글쎄요... 혼란 속에 영웅을 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박정희가 틈을 잘 노린 것도 있죠. 솔직히 1년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때는 혼란도 거의 수습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반면 6월 항쟁에서는 사람들이 밀던 민주화의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각기 한 번씩 대통령이 됐죠. 그 이후... 우리는 지금도 민주주의가 뭐냐, 민주화가 뭐냐 하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이게 민주주의다"라고 뻗대긴 했지만, 아마 이건 제게 평생의 숙제가 아닐까 싶네요.
한국 민주화 역사상 가장 큰 쾌거, 하지만 그만큼 많은 숙제를 남긴 4.19 혁명, 그렇다고 숙제에 매달려 중요한 걸 잊으면 안 되겠죠. 그 때 민주화를 위해 일어났고 싸웠던 분들 말입니다. 쓰레기통에 꽃이 피는 수준이라 여겼던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이렇게 이른 시기에 시작됐습니다. 그 이후 또 다른 독재를 만났지만, 그렇다고 그 의의를 가릴 순 없습니다.
이번 편은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4.19 후 2 공화국의 혼란, 그 틈을 노린 5.16 쿠테타까지는 다음 [오늘]로 미루겠습니다. 새벽까지 사진 및 내용 보강 하겠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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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4.19 관련된 글은 열사들에게 집중하는 경우가 많던데, 이렇게 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집중하는 글은 새롭네요.
본문에 "아마 그런 미친 시대에 그라는 인물이 가장 적합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미쳤다는 게 변하는 건 아니죠."라는 부분이 여운이 많이 남네요. 아마 지금에 대입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진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야를 떠나서, 진영을 떠나서 '현재의 정치상이 현재의 한국에 가장 잘 어울릴 거라는, 그게 바로 한국의 현주소일 거라는 점'과,
'하지만 분명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옳은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하는 것과 동시에 이상을 추구하는 것,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발전상을 보여주지 못한것이 큰죄이죠
그 미국에 엄청난 원조는 다 어디에다 쓰이는지 여전히 국민들은 굶주렸죠
예전에도 썼듯이 최고의 반공은 경제 발전인데 이승만 제대로 반공을 하지 못한거죠
미리 스포(?)를 하자면 박정희의 경제 발전 모델은 천조국 미국도 아니고 한일협정을 맺은 일본도 아니였죠.
박정희도 반공을 외치지만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구호일뿐 그가 선택한 경제모델은 공산주의에 끝판왕인 바로 소련이였죠
스탈린의 경제발전 5개년을 한국식으로 바꿔 하였고 특히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과정은 이게 과연 자본주의체제인가 사회주의 체제인가 햇갈리기도 하죠 물론 한국식 경제개발5개년은 장준하씨가 먼저 이론적으로 확립하였고 장면내각이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애초에 독제체제가 아니고서 자본주의체제에서 가능할수있는 것인지 의문이 드네요
아무튼 러시아, 한국 두나라에서 각가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스탈린 박정희지만 둘이 비교 해보는것도 재미있을것 같네요
이승만 개인적인 능력은 참 괜찮았을지는 몰라도 그가 정치지도자가 되기에는 한 없이 부족했죠.
괜히 여러군데에서 욕 먹은게 아니죠.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죠.
그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여러모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