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12/04/10 22:54:54 |
Name |
nickyo |
Subject |
여느때와 다름없는 커피숍에서 벌어진 꽁트. |
사장님도 여직원도 다 쉬는 날, 어쩌다 보니 혼자 카페를 보게 되었다. 작은 카페라 손님이 마구 들어오지만 않는다면야 혼자서도 헉헉대며 할 정도는 아닌데, 그날따라 솔찬히 손님이 들어와서 앉을 새가 없었다. 겨우 다 팔고 설겆이까지 끝낸뒤에 시간을 보니 마감까지 1시간. 매번 이렇게 혼자 둘 때에는 손님 없으면 일찍 닫으라는 사장님이 생각난다. 가게 문을 닫고 일찍 들어가 쉴 생각에 신난것도 잠시, 한 커플이 들어온다. 웃음 반 울상 반으로 안녕하세요를 외쳤다.
커플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둘 다 주문할 생각이 없는 듯 앉아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질 것 같으면 목소리를 낮추자며 그들은 고요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나는 대화의 맥이 멈출때를 기다려 주문을 받고 싶었지만, 그들은 이미 커피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20분동안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60년대 미국의 올드팝의 소리를 줄이고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았다.
"그 여자 누군데?"
"신경쓸거 아니라고."
"왜 말을 못해?"
"짜증나게 왜그래 너랑 잘 만나고 있잖아?"
"나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나 구속받는거 싫어하는거 몰라?"
"내가 오빠 밤에 놀고다니는거 뭐라고 한 적 있어? 잠수타면 타나보다, 바쁘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파토나면 나나보다. 근데 이것도 그런가보다 해야해? 딴 년 만나는것도?"
"야 걔가 왜 년인데?"
"지금 내 앞에서까지 걔를 그렇게 싸고 돌려고? 뭐하자는거야 진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때다 하고 졸졸졸 가서 주문을 받았다. 남자는 냉수, 여자는 핫초코. 약간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싸우는 동안에도 핫 초코라니..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뭔가 상황이 꽁트같다고 생각했다.
냉수를 따르고 핫 초코를 만들고 있는데, "그럼 꺼져!! 아 뭐나 짜증나게 하네 진짜"하고는 남자가 뛰쳐나갔다. 여자는 똥씹은 얼굴이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또르륵 흘린다. 아 이런.. 핫초코를 뜨겁게 스팀하기 전이어서 다행이다. 조금 진정할때까지 일단 기다려야겠다. 몇 분이 지나자 들썩이던 어깨가 조금 추스른 듯 싶어 핫초코를 데웠다. 평소같으면 하트나 꽃 같은 걸 애칭*해주었을텐데 왠지 그러면 정말 꽁트같잖아.. 차였는데 핫초코가 나오고 거기에 하트라도 그려져있으면..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힘 내'를 쓰기로 했다. 이 가게는 동네가게라 오지랖이 넓은게 유일한 장점이라서.
그래서 열심히 힘 내를 조심조심 다 쓰고 서빙을 하려는 찰나, 남자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그 여자를 와락 붙잡고 일어나 껴안는다. 여자는 투닥투닥 놓으라고 하지만 더 세게 껴안는다. 미안해, 잘못했어. 정말 그런거 아냐. 걔 그냥 후배야. 나도 오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랬나봐. 미안해. 그럴 일 없을꺼야. 잘할게.. 멍.. 이게 무슨 아침드라마냐...
그러고 나서 핫 초코를 보니 힘내라고 써있었다.
이걸 어떻게 내보내....
그래서 재빨리 핫초코를 치우고 다시 만들려고 했다. 화해를 했으니 하트를 그려야지. 아 귀찮아 죽겠다 진짜.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투덜대며 다시 핫초코를 만들고 있는데 이것들이 화해의 키스까지 때리고는 '아직 안나왔어요?' 라고 묻는다. 야 잠깐만 내가 짜증이 날 지경이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네 금방나갑니다'라고 했다. '손님도 없는데 뭐 이렇게 느려..' '아 그냥 종이컵에 주세요'라고 오랜 기다림에 지친 듯 짜증스런 목소리를 낸다. 빌어먹을 오지랖. 알겠습니다. 하고 종이컵에 담아 얼른 내보내 버렸다. 돌아가는 둘의 뒷모습이 어쩌면 저리 사이좋아 보이는지.
한 쪽으로 치워둔 식은 핫 초코를 버리려고 했더니, '힘 내'라고 써있었다.
내가 쓰고 내가 힘내기 돋네..
그냥 버리기 아쉬워 한 모금 삼키고 힘내기로 했다. 꽁트의 주인공이 저 여자가 아니라 내가 되었구나.
*애칭
->커피등의 음료를 만들때 스팀한 음료 거품위에 시럽과 펜을 이용하여 이것저것 무늬를 그리거나 글자를 그리는 기술...이라고 하면 그럴듯하지만 그냥 음식에 장난치기.. 음식가지고 엄마한테 등짝 맞아요-by 정다정
P.S
지금 깨달은건데, 제가 주로 꽁트의 주인공이되어 그레이트 빅엿은 아니어도 소소한 엿을 먹은 이야기를 pgr에선 너무 좋아하세요. 너무하는거 아님요...................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2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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