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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1/02 15:20:13 |
Name |
PoeticWolf |
Subject |
본격 저탕형 보일러 찬양 포스팅 |
어머니집 보일러는 저탕형입니다. 보일러가 어느 정도 양의 물을 끓인 후에야 뜨거운 물이 나오는 방식을 말합니다. 때문에 온수 스위치를 누르고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문을 닫고 각자의 세상에서 왕처럼 노닐다가 잠깐 나온 아들과 딸이 바깥 행차하시러 온수 버튼을 누르면 파수꾼처럼 보일러가 있는 베란다 앞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보일러가 물을 다 끓이면 물이 끓었다며 아뢰셨습니다. 한 번 끓인 물 양이면 샤워나 머리 감는 것이 충분했기 때문에 보일러 버튼을 끄는 것 역시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다 자리를 지키지 못해 물이 너무 많이 끓은 날이면 돈이라도 떼이신 듯 안타까워하시며 당신이 목욕을 시작하셨습니다.
분가해서 새로 이사 온 집은 순간식 보일러를 씁니다. 보일러를 켜두면 뜨거운 물 수도를 비틀어 꺾는 동시에 보일러가 통증을 감지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명을 콸콸 쏟아냅니다. 적어도,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저희 집 보일러는 아무리 수도를 꺾어도 작은 움직임조차 없습니다. 어디 신경이 없는 듯, 너무나 평온한 온도 게이지를 보고 있자면 차라리 제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지경입니다. 보일러 회사를 부르니 이건 아파트 수압이 낮아서 물이 지나가는 걸 보일러가 감지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놓은 해결책은 ‘싱크대 물도 함께 틀기’였습니다. 화장실과 부엌 양쪽에서 비틀면 제 아무리 둔한 녀석이라도 소리를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희는 한 사람이 샤워하러 들어가면 나머지 한 사람이 바깥 싱크대에서 보일러 온도 게이지를 봐가며 물의 양을 조절해야 했습니다. 이를테면 돌아가며 파수꾼 놀이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옆집에서 물을 함께 사용하면 이런 방법도 무의미해졌고, 화장실 안 샤워기 구멍에서 마치 실 가닥처럼 흐르는 물의 근원을 발견한 듯한 아내의 절규를 같이 발 동동 구르며 듣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열심히 살아서, 더 근사한 집에서 살게 하지 못한 걸 죄스러워하면서 말이죠.
순간식 보일러가 더 최신 방식이라고 들었는데, 집이 낡아버리니 오히려 온수를 기다려야 하는 저탕형이 더 나은 방식 같아 보였습니다. 별로 씻기를 즐겨하지 않는 터라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불과 5~6분 전 새해 결심을 한 듯 기세 좋게 온수 버튼을 눌렀던 의지가 종종 꺾여 괜히 애꿎은 엄마만 샤워를 수차례 시켜드렸었는데, 어차피 깔끔 떠는 아내도 만났겠다, 주인과 상의하여 저탕형으로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대답은 ‘안 된다.’였고, 저희는 계속 문제 제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분간 물을 받아 써라, 방법을 강구해보겠다는 어르신들의 말을 믿고, 또 어차피 날은 추워지고 방법은 그 것밖에 없어 냄비에 물을 받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냄비에 물을 받아, 차가운 물과 섞어 사용하는 궁상을 떨고, 아내는 저를 싱크대 앞에 세워놓고 매일 수맥을 발견한 듯 환호성을 화장실 안에 울려 퍼트렸습니다. 주인 어르신이 수압을 높여주실 때까지 저흰 매일 그렇게 궁상과 탐험을 번갈아 오갔습니다. 남편으로서 참 안쓰럽고 미안했던 기억입니다.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와 저탕형 보일러로 샤워를 했습니다. 버튼을 누르고 5~6분 기다리니 보일러에 끓는 물이 채워졌습니다. 더운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 난리를 겪고 난 후라 그런지 새삼 든든했습니다. 하긴, 순간식 보일러를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물탱크에 있는 찬물이 사실은 전부 예비 더운 물입니다. 종종 물을 끓여놓고 식혔던 저 같은 사람이 쓰기에는 오히려 순간식이 더 에너지 절감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한지라, 순간식 보일러에 오만 정이 떨어지다보니 저탕형 보일러에 정감이 갔습니다. 찬물에게서 그 옅은 온기를 순간 쥐어짜는 것과 쓸 만큼만 미리 덥힌 물을 알뜰히 채워놓고 쓰는 것의 차이는, 마치 무작정 아날로그한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 외치는 사람들의 이상한 억지와 다를 바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오랜만의 저탕식 샤워는 씻기 싫어하는 저 같은 사람도 오래오래 즐기고 싶을 만큼 부드럽고 포근했습니다.
그래서 샤워기 밑에 조금 서있기로 했습니다. 보일러가 미리미리 채워둔 따듯한 물이 이번엔 수증기로 화장실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이 마치 시간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이렇게 오래 한 것이 기억에 없는지, 그 동안 신경 써서 보질 못한 건지, 신기합니다. 보통 같았으면 칼 같이 시간을 재서 뭘 이렇게 오래 씻냐고 물어보셨을 어머니가, 자식과 달리 살갑게 말동무가 되어주는 며느리 앞에서 파수꾼의 본분을 잊으신 듯합니다. 마루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두런두런 쌓이는 모습이 선합니다.
씻는 것 하나 참지 못하고, 5~6분 물 끓는 것도 참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것 참지 못해 방황만 하다가 젊은이의 시간을 쓸 데 없이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마루의 두 여인은 시간의 속성에 대한 정의를 계속해서 새롭게 내립니다. 며느리만 보면 봇물처럼 말을 쏟아내시는, 그 동안 외로웠을 엄마나, 시어머니 손 한 움큼 잡아가며 그 많은 단어들을 담아내는 아내의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흐뭇합니다. 너무 흐뭇해 그 동안 인생 낭비한 것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 사람들이 있는 한 내 과거의 시간은 흘러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곳에 차곡차곡 채워진 것이구나,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됩니다. 젊은 시절을 헛 살았다는 자괴감이 나도 모르게 잘 살아졌다는 뿌듯함으로 변합니다. 날 위한 저탕형 보일러는 어느 새 물을 받아 더운 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 그걸 이제야 발견합니다. 거울의 수증기를 닦아내고 절 마주합니다. 채워진 시간이 뒤에 있어 든든합니다.
갑자기 따듯한 물이 다 바닥났는지 찬 물이 머리부터 쏟아집니다. 그 익숙했던 아내의 환호성을 제가 지릅니다. 수도 탭을 꺾어 은혜를 갚습니다. 총각 시절부터 날 씻겨준 것에 대한 감사가 새삼 손에 흥건합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1-09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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