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11/12/19 01:20:20 |
Name |
PoeticWolf |
Subject |
김치찌개 만들기 |
집이 작아서 그런지 휴일 아침이 조용해서 그런지 작은 뚝배기 안 찌개가 유독 요란합니다. 아내가 깰까봐 조마조마합니다. 물이 너무 많은 듯해 졸이려고 뚜껑을 열어 놨더니 금세 집안이 김치 끓는 냄새로 찹니다. 가끔 한 번씩 끓일 때 나던 냄새와는 다른 향이라 만족스럽습니다. 김치를 건져서 물만 넣고 끓이면 김치찌개가 된다고 비법이랄 것도 없는 요리 노하우를 늘 자신있게 말하던 아빠에게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 십 년만에 깨닫습니다. 아니, 아빠도 김치를 먼저 양파와 함께 볶은 후에 쌀뜬 물을 넣고 끓여야 감칠 맛이 난다는 걸 모르셨겠지요. 오랫동안 아빠 자신 외에는 아빠가 끓인 김치찌개를 먹을 사람이 없었을테니까요.
냄비쪽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찌개를 괴롭히던 불길이 오히려 찌개에게 뒤통수를 맞고 뜨겁다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스렌지에 음식 묻는 거 싫어하는데, 큰일입니다. 얼른 가서 둘을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입벌리고 구경하고 있던 참치캔을 거꾸로 들어 거품이 이는 국물 속으로 텁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요리를 거들지 않아도 김치찌개에 참치를 넣으면 맛이 더 농후해지고 생선의 영양도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다는 팁 정도는 아빠도 쉬이 알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참찌개야 워낙 흔한 음식이니까요.
참치를 넣고 저도 모르게 휘휘 젓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덩어리 큰 참치살 건져먹는 걸 좋아한다는 게 기억나 그냥 둡니다. 그러고보면 아빠의 김치찌개에선 별별 육류들이 살았습니다. 썰지 않은 부산 오뎅이 찌개 한 가운데 시체처럼 유영하기도 했고, 숫가락 깊숙히 집어넣어 퍼올리면 스팸 조각들이 김치 잎사귀 사이사이에 숨었다 화들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오뎅이며 참치, 스팸이 한 번에 들어가 있던 날도 있었고 둘둘이 짝지어 날마다 다른 맛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10년 밥상에서 단백질을 담당했던 고마운 놈들입니다.
잠잠하던 밥솥이 알람처럼 시간에 맞춰 노래를 합니다. 요즘 밥솥에서는 로고송이 나옵니다.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갓 지은 밥 냄새가 열맞춰 들어서면 집안에 부드러운 온기가 배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아침의 냉기에 낯설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10년만에 돌아온 한국, 아빠 혼자 사시던 가난한 옥탑방은 너무나 낯설었습니다. 실망과 좌절이라기보다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비행 24시간만에 환경이 너무 크게 바뀌었나 봅니다. 하지만 아빠가 매일 아침 해놓으신 밥만큼은 멀리 두고 온 엄마의 그것과 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놀랐던 마음은 매일 절 깨우던 아빠 밥냄새로 점점 누그러져 갔습니다.
하지만 김치찌개만 매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점점 바깥 세상의 다른 음식들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고 밥값을 벌었습니다. 바깥 활동이 늘어가면서 메뉴 고민은 해결됐지만, 아빠의 김치찌개는 다시 외로워져 갔습니다. 수저 한 세트로 충분한 밥상은 아들이 타지에 있을 때나 한국에 있을 때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빠는 그런 김치찌개에 너무 오래 길들여져 왔나 봅니다. 가족이 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온갖 다른 찌개며 국이며 야채며 마른 반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웅성웅성한 식탁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옥탑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깟 김치찌개가 뭐라고, 식구를 저버리나 싶었습니다. 김치찌개만 보면 제 마음이 펄펄 끓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는 숟가락도 대지 않겠다, 온 세상 김치찌개를 저주했습니다. 결혼식에서 오랫만에 본 아빠가 줄 게 없어 미안하다며 고모를 통해 쌈짓돈을 건네 주시기 전까지는요.
아내가 기지개를 펴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립니다. 하긴, 요리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 아침부터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으니 진작 깼을 것입니다. 내심 궁금한 거 참으면서 기다렸던 그 마음에 밥솥 로고송이 계기를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방문을 엽니다. 아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김치찌개를 발견합니다. 아빠와는 다른 찌개 맛으로 저에게 주어진 가정을 만들어가고 싶었던 저의 마음까지 발견할 수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침에 갓지은 밥냄새로 잠을 깨는 것이 너무 좋다며, 김치찌개에 대한 평가를 나중으로 미룹니다. 코가 편안하니 몸까지 따듯하다고 반가워합니다. 시간을 건너 아빠의 밥알람이 새로이 늘어난 식구의 아침을 끌어 안습니다. 일찍이 아빠를 여읜 아내의 마음에 또 다른 부성애가 스밉니다.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갑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12-2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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