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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1/11/21 23:00:55 |
Name |
별마을사람들 |
Subject |
...어머니 |
한 개인의 소소한 가정사를 소재로하여 글을 써도 되나...
아니, 너무 주제 넘은 짓일꺼야.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렴.
그리고 네가 기억하고 있는 그 슬픔을, 안타까움을, 혹은 아름다움을 죽을때까지 아껴봐~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고, 가족이 있고, 더 나아가면 주변의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혹은 슬프고 아팠던 사랑이 가슴속에 하나 정도 쯤은 있겠지.
어느 소설가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처럼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자신이 없다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고, 누구나 말하고 싶은 이야기지만
그 누구나의 감정을 들쑤셔놓을 자신이 없다면...그만둬.
그래도 오늘 만큼은 누군가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다.
그냥 주저리 주저리 두서없는 이야기, 술먹고 뭐가뭔지도 모르면서 무의식중에 나오는 아픈 말처럼...
가끔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때가 있잖아.
그냥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나만의 특별한 어머니가 있었다고 말야.
외할아버지는 절름발이였어.
기억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회색 무명저고리에 늘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셨지.
생각해 보면 작두에 손가락이 몇개 잘리셔서 지팡이 잡는 손도 어색했었지.
젊었을 때는 어느 부잣집 머슴이었대. 일년에 두 번 정도,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사탕을 사가지고 오셨었지.
외할머니는 앉은뱅이라서 방학때 외갓집에 갔을 때만 뵐 수 있었지.
엄마가 태어난 날은 잘 모르겠어.
주민번호는 사삼일일공삼인데...그게 그 시대에 정확했을리가 없지.
음력으로 몇월 며칠인지는 알고 있지. 그리고 그 날이 엄마 생일이고...
엄마는 맏이였는데
내가 본 엄마의 형제는 큰외삼촌, 작은외삼촌, 그리고 이모가 전부야.
외할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했는데, 늘 배가 고픈 날들이었지.
엄마한테 딱 한번 들은 이야기가 있어.
전날 비가 꽤 많이 와서 밤이 상당히 떨어졌을 날에...
남동생 등에 업고 밤 주우러 갔다가 마침 그네가 있어서
그네를 탔다고...
남동생은 엄마등에 업혀 있었는데...그만 세게 그네를 타는 바람에 목이 꺾여...
....그냥 외할머니한테 혼났대. 허허.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 볼까?
이모는 버스 안내양을 했었지.
몇 번 봤어.
그런데 요새말로 말하면 남자한테 속아서 몸주고 마음주고...지금 생각해 보니 버스 기사였던 것 같아.
외갓집 뒷산에 올라 목을 매었지.
난 그때 국민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 이모가 집에 놀러와서 밥도 해놓고, 빨래도 해놓고...
(엄마와 아빠는 목장에 일하러 갔었지)
저녁때 같이 밥먹고 엄마랑 이모랑 같이 잤었거든.
엄마가 많이 슬퍼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네.
하지만 한달 정도 후에
큰누나가 죽었을 때는 정말 슬퍼했던 기억이 나.
거실이 있고 안방, 작은방이 있었는데 식구들 모두 안방에서 자고 있을 때 작은방에서 큰누나가 싸이나를 마신거야.
다음날 아침에서야 발견 되었지.
큰누나는 나와 동생한테 엄청 무서워서...(작은 외삼촌보다 한살 더 많았거든) 큰누나가 이제 없다는 생각에
아, 글쎄 동생놈하고 같이 낄낄댔던 것 같아.
그리고 학교 갔다가 왔는데 이웃 부잣집할머니하고 엄마하고 큰누나를 삼베로 칭칭감는걸 봤어.
미이라 같았고 기분이 되게 이상했지. 그 큰누나는 스물이었지.
멍하니 있다가 엄마를 찾았는데 큰누나랑 같이 경운기 타고 앞산 공동묘지로 향하는 모습이 보이더군.
큰누나 묘라도 알아둘껄...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너무 후회가 돼.
엄마는 몇달 후에 목을 맸는데 다행히 공동묘지 올라가는 엄마를 수상하게 본 동네 사람의 덕분에 살았어.
그 이후 엄마가 담배를 배웠지. 아빠가 한대 피워보라고 권해 줬다고 해.
지금도 집에 갔을 때 용돈 드릴때 하는 말이
'엄마, 담배 값 해...'
아빠는 그 이후 2년 정도 후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지.
음...당시엔 별로 슬프진 않았던거 같아.
엄마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아주 외딴 시골에서 읍내로 이사를 나왔지.
엄마 혼자 농사짓고 살기가 너무 힘이 들었으니...
엄마는 식당 설겆이를 하다가 몇 달 못하고 때려치고 노가다를 했어.
그땐, 참....
국민학교 6학년 때였는데 부모 직업란 쓰는게 참 어려웠었어.
처음엔 건설업인가? 그건 아닌 거 같고, '노가다'라고 썼다가 선생님한테 혼났지.
이미 그때부터 도시락을 싸간적이 없었던 거 같아. 그때도 김치만 싸갖고 가는 게 창피했었나봐.
읍내라서 집과 학교가 가까워서 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가끔 준비물 안해왔다고 교실에서 쫓겨나 집에 와 있는 동생을 보곤 했지.
그래도 좋다고 낄낄댔어.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외갓집 주변 아줌마가 엄마를 찾아 학교로 온거야.
작은 외삼촌이 농약을 먹었는데
위세척하고, 정신 차리고 난 다음에 엄마가 보고 싶다고...
며칠 후에 엄마가 와서...한숨 푹 쉬면서 하는 말이
'누나, 살려줘...살려줘'
외삼촌이 그러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엄마한테는 내가 있고 남동생이 있고, 누나 둘이 있지.
그런데 엄마의 기억속에는...
딸이 넷이 있고 아들이 셋이 있지...
3년전쯤 외숙모한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엄마랑 같이 외숙모 사는 도시로 내려갔지.
큰외삼촌도 돌아가신지가 10년이 넘어서...
외할머니는 요양소에 계시다가 가신 것인데,
외할머니를 보시자마자
'엄마~~'하고 우는 모습에
엄마도 엄마가 있구나...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었구나...
아,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가까이 두고 싶었을까...
....임종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몇 전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보여줬던...
외할머니가 준 용돈이란다 하면서 꼬깃꼬깃 수십장의 천원짜리 한 웅큼.
'너 가져가 써라...'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니한테 소원했던 외숙모가 아닌
중학생, 고등학생 조카들이 주었을 그 돈을....
'엄마~~~ 그걸 내가 어떻게 써...'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일자 무식...
아빠한테 시집와서 간신히 한글 배우고, 달력 보는 법을 익힌 엄마..
학교 정문앞에 여관 지을 때...
엄마가 시멘트를 개고 있으면 왜 그렇게 친구들에게 창피했었는지...
이제는 정말 하나도 창피하지 않은데...자랑스러운데,
왜 엄마는 예전처럼 힘있게 삽을 젓지 못하고
계단 하나 두개에 힘들어 하는 건지...
그 숱한 혈육의 죽음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때 그 엄마를 두고 죽음을 생각했었던 내가...
아,....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이 글을...뭣도 아닌 이 글을 쓰는 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며칠째 꾸는 엄마의 죽음이 그냥 개꿈이기를 바라는 나는...
...엄마, 미안해.
* 빨간 남방
자정이 다 될 무렵
곱창 집에서 잠시 입구로 고개를 돌렸을 때
건너편 비디오방 입구에 쪼그리고 있는
한 늙은이를 보았다
늙은이는 빨간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고
쇠갈퀴 같은 손으로 폐지를 모으고 있었다
술자리는 벌써부터
알코올이 흉기로 바뀌어
세 치 혓바닥, 테이블 위에 난무하고
바닥에 떨어진 깨진 소주병은
이미 속절없이 상처받은 뒤였다
군청에서 단체복 이라도 지급한 듯
동네 아낙들의 통일된 몸빼 바지
어머니는 그 위에 언제나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일터로 나갔다
가끔은 학교에서 돌아와
마당 빨랫줄에 걸린 남방을 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빨랫줄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직접 그 옷을 만져봐야 했고,
그 옷은 노동의 상징이자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상처 입은 소주병마저 쓰레기통으로 사라졌을 때
나는 택시 안에서 길 건너 거북이처럼
폐지를 가득 지고서 엉금엉금 움직이는
어머니를 보았다
남루할지언정 십 년 넘은 옷이
어쩌면 구멍 하나 나지 않았을까
그 옛날 빨랫줄에 걸려 있었던 건
어머니의 옷이 아닌
나와 동생의 목숨들
그리고 그 목숨들만큼이나 질겼던
어머니의 빨간 남방
택시 백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여기저기 구멍난 어머니의 인생을 훔쳐보다가
'오늘은 정말 재수 없는 날이야‘
기어이 뺨을 적시고야 말았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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